구름이 전하고 바람이 일러주는 이야기, 백암산전북 장성 ·정읍 ·순창 백암산 ·741m
내장산 국립공원, 공원이름에 왜 정읍의 ‘내장산’만 들어갔냐고 장성 사람들은 화를 낸다. 국립공원 내엔 내장산, 백암산, 입암산, 삼성산, 화개산 등을 포함하고 있으니 그 이름을 ‘내장산·백암산 국립공원’으로 고치라는 성화다. 예부터 내장산과 백암산을 조선 팔경 중 하나로 꼽아왔으니 장성군민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내장산은 신선봉(763m)을 위시한 아홉 개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내장사를 둘렀고, 백암산(백양산)은 상왕봉(741m)을 비롯한 다섯 개 봉우리가 백양사를 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봄 도다리, 가을 전어’ 또는 ‘사람은 서울, 말은 제주’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예부터 내장산과 백암산을 두고 ‘봄 백양, 가을 내장’, ‘산은 내장, 고적은 백암’, ‘산은 내장, 절은 백양’ 등의 말이 회자되고 있다. 백암산 산행의 들머리를 내장산 신선봉에서 가까운 대가저수지 위 대가마을로 잡았다. 대가마을을 들머리로 내장산 신선봉을 향해 오르면 백암산 전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우측으로부터 상왕봉(741m), 도집봉, 722m봉, 백학봉(651m) 등이 앞뒤 좌우로 나타난다. 마치 도열을 마친 후 열병식을 기다리는 모습 같다. 산록은 색 바랜 풍경을 걷어내고 신록들이 이미 차고 앉았다.
산속에 숨은 이야기 찾으며 걷는 순창새재
대가저수지 옆 ‘순창새재길’이 길게 꼬리를 드러낸다. 순창새재길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잡혀 우거(牛車)에 실려 한양으로 압송되던 길이다. 녹두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흩어지고, 전봉준은 장성 북쪽에 있는 입암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장성새재와 순창새재를 거쳐 순창으로 도피했다. 전봉준은 해산시켰던 동학농민군을 모아 일본군과 재결전을 도모할 계획으로 담양 이웃마을 순창으로 가다가 지인 김경천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된다. 담장을 넘어 피신하는 전봉준을 마을사람들은 돌과 몽둥이를 휘둘러 그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동학에 희망을 걸었던 백성들은 전세가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기울자 동학군으로 향하던 마음을 걷어 들이고 실제 권력에 충성심을 보인 것이다. 그것이 목숨이나 부지하려는 세상 속 힘없고 나약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전봉준은 담양옥사에 이틀 동안 갇혔다가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4월 참수형을 당한다. 구한말, 이 땅에 녹두꽃은 피기도 전에 땅에 떨어졌다.
내장산 최고봉 신선봉(神仙峰·763m),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뒀다고 했던가? 사실 신선봉에 신선들이 내려온 게 아니라 신선봉 동쪽 아래 금선골 금선대에서 신선들이 노닐었다. 내장산의 원래 이름은 신령이 은둔한 산이란 의미로 영은산(靈隱山)으로 불렸다. 이름에서 보듯 도교의 영향력이 강해 그 신도가 많았고 하늘에 제를 올렸던 곳으로 추측한다. 불교의 등살에 도교의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신라왕실을 등에 업은 불도들이 산기슭마다 사암(寺庵)을 세웠다. 조선 명종 때 희목대사는 “신령스런 것 외에 또 다른 뭔가가 있다”며 영은사란 이름을 ‘내장사’로 바꾸자 산 이름 역시 내장산으로 바뀐다. 혹자들은 내장산의 이름을 들먹이며 ‘많은 사람들이 계곡 속으로 들어가도 잘 보이지 않자 마치 양의 창자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구절양장·九折羊腸)’며 붙인 이름 또는 ‘산 안엔 무궁무진한 것이 숨겨져 있다’고 해서 붙였다는 유래들도 거론한다.
신선봉에선 내장산 여덟 개 봉우리를 모두 조망할 수가 있다. 딱 하나 아쉬운 것은 내장산 봉우리들을 연꽃잎으로 비유하는데 꽃술자리에 있다는 내장사가 신선봉에선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신선봉 동북 쪽 중턱에 기암괴석 하나가 솟구친 것이 ‘금선대(金仙臺·675m)’다. 금선대는 신선들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와 노닐 때 선녀들이 시중을 들었다는 전설이 담긴 곳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내장사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신선봉 신선들의 바둑과 장기 얘기도 이곳에서 유래된 이야기로 혹 신선봉이란 이름의 모태가 된 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금선대 너머로 내장산 아홉 봉우리 중 병풍바위란 별칭을 갖고 있는 서래봉(西來峰·624m)이 보인다. 서래봉 아랜 추사 김정희가 지었다는 벽련암(碧蓮庵)이 아련하다. 서래봉은 서리가 내린 후 봉우리 일대의 단풍이 특히 일품이라고 했다. 서래봉의 이름유래는 농기구 ‘써레’처럼 생겨 ‘써레봉’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고, 선불교의 효시 달마조사가 서쪽인 중국 양나라에서 동쪽인 이곳으로 왔다는 ‘서래(西來)’라는 이야기도 있다. 고래의 우리 이름이 불교에 쫓기는 형국이다. 달마대사가 온 곳이 해남의 달마산인지 아니면 내장산 서래봉인진 오직 달마대사만 알뿐이다.
까치봉(717m) 쪽으로 가다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소둥근재(소죽음재, 소동근재, 소뒹군재, 소지갱이)’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소둥근재의 이름유래를 추측해 보면, 짐을 가득 싣고 고개를 오르던 소가 뒤에 매단 마차의 짐을 이기지 못해 마차와 함께 뒹굴어 죽은 곳으로 추정된다. 오래된 절에 가면 절의 중창이나 중건 당시 일하다 죽은 소의 무덤을 종종 본다. 계룡산 갑사의 공우탑, 청량산 청량사 삼각우총, 달마산 미황사 우분리 전설 등이 그것이다. 얼마 전까지 소는 인간세상에서 힘든 일의 대부분을 도맡아 하던 중요한 노동력이었지, 지금처럼 영양분을 보충해주던 음식은 아니었다.
능선에 구름 걸리듯 산에 얽힌 전설들
순창새재를 넘어 당도한 백암산 상봉(上峰) 상왕봉(象王峰·741m)의 조망은 난망이었다. 상왕봉은 볼거리나 얘기 거리가 별로 없는 밋밋한 봉우리로 ‘가야’란 별칭이 붙었다. 가야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소’나 ‘코끼리’라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모친 마야부인이 흰 코끼리를 품에 안는 태몽을 꾼 후 싯다르타가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천축국의 도시이름이라는 설도 있어 가야란 이름은 불교성지란 의미가 강하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코끼리 ‘상(象)’ 자의 의미가 부처님의 지혜나 청결 또는 순결을 나타낸다고 한다. 고대 인도에선 흰 코끼리가 생명의 근원을 뜻하고 또 비를 내려 만물을 소생시킨다고 했으니 결국 산정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며 풍요와 자녀잉태를 빌던 우리의 토속신앙에 일치시켜, 산악신앙을 신봉하는 신도들을 흡수하려는 불교세력이 주입한 마취제 같은 이름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조선 명종 때 희목대사는 “신령스런 것 외에 또 다른 뭔가가 있다”며 영은사란 이름을 ‘내장사’로 바꾸자 산 이름 역시 내장산으로 바뀐다.
상왕봉을 넘고 도집봉(741m)을 지나 722m 봉우릴 앞둔 지점, 나뭇가지를 부채살처럼 펼친 반송(盤松)이 단단한 바위에 뿌릴 박은 채 모습을 드러낸다. 반송이 있는 지점은 백암산 가인봉(佳人峰 혹 加人峰·667m)과 백암산 서남쪽을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전망대다. 능선을 따라 백학봉(白鶴峰·651m) 정상이다. 백학봉을 일명 ‘학바위’라고도 하는데, 회백색 바위벽이 넓게 펼쳐 있는 모습이 마치 백학이 날개를 펼치고 막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란 설명이다. 학바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온통 바위투성이에 천길 벼랑뿐이다. 학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세상이 어찌 저리 한줌의 모래알처럼 하찮게 보이는지….
학바위 아래 고불총림 백양사가 요처에 자릴 잡았다. 백양사 대웅전과 쌍계루가 내려다보이는 백학봉 학바위와 숲 그리고 백양사가 너무 아름다워 이 주변을 명승 38호로 지정했다. 학바위에서 상왕봉 쪽을 바라보니 상봉(上峰)인 상왕봉 아래 운문암(雲門庵)이 남쪽을 향해 봄볕을 듬뿍 받는 중이다. 전생에 많은 적선(積善)과 적덕(積德)을 쌓고, 이승에서 작은 인연의 실오라기라도 품어야 운문암 툇마루에 한번이라도 앉을 수 있다고 했으니 운문암의 영기(靈氣)가 신선들의 주재처와 다를 바가 없다. 운문암(雲門庵), 아무리 안개 낀 날이라도 문만 열면 산 아래 전경이 훤히 보인다고 암자의 이름이 구름문(雲門)이다. 운문암을 일컬어 ‘어머님 품 속 같다’며 변산의 월명암, 대둔산 태고사와 더불어 호남의 3대 영지(靈地)로 손꼽았다. 운수납자가 수행하기 좋은 선원(禪院)으론 ‘북쪽엔 금강산 마하연, 남쪽엔 백암산 운문암’이란 말이 바람과 구름을 따라 수행 세상에 전해질 정도니 아마 운문암의 선풍지기(禪風之氣)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한국동란 때 소실된 운문암을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서옹 스님이 다시 문을 열었고, 서옹 스님은 이곳에서 좌탈입망(坐脫入亡·앉은 상태로 입적)했다는 소식이다.
학바위에서 목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깎아지른 낭떠러지기 길이다. 낭떠러지기 옛 돌계단 위에 넓고 큼직한 나무계단을 덧깔았다. 그래도 일부 산행객들은 불안하다며 좀체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백학봉 학바위는 진짜 학의 날개를 펼쳐 놓은 듯 끝도 없이 이어지고 덕분에 나무계단 역시 끝도 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이다. 백학봉과 상왕봉, 도교와 불교가 서로 백암산에서 좌웅을 겨룬 듯하다. 산록은 불교가 점령을 했지만 산 이름에선 아직도 도교풍의 흔적이 남아있다. 백암산에서 고래의 향풍(鄕風)신앙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물이 떨어지면서, 백학봉부터 갈증을 참아왔다. 일찍 찾아온 더위 탓에 산행객들의 물통마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타는 목마름이 더 간절한 산행객에게 얼마 남지 않은 물을 양보한 걸 이렇게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갈증을 느끼면서도 산행객 모두에겐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다. 바로 학바위 아래 영천굴(靈泉窟 또는 영천암 靈泉庵)엔 한 모금만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달디 단 석간수 감로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갈라진 채 우뚝 서있는 바위벽도 비경이었지만, 바위 곁 석굴 또한 절경이다. 더구나 굴 안 영천 감로수는 갈증 탓인지 몰라도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영천굴은 위아래 2개의 굴이 있는데, 아래쪽 굴은 약수인 영천이고 위쪽 굴엔 석조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영천굴 석간수의 이름이 관음보살이 내미는 감로수였던 모양이다.
조선 선조 7년(1574년), 학바위 아래 영천암에서 정토사(백양사의 옛 이름)에 주석하고 있는 지완 스님이 아미타경 설법회를 연다. 구름 같은 군중이 모여들어 지완 스님의 설법을 들었다. 설법회를 마치기 전날 밤, 지완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설법을 듣고 깨달아 사람으로 환생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다음 날 아침 지완 스님은 영천암 아래 흰 양 한 마리가 쓰러져 죽어있는 걸 발견한다. 지완 스님의 법명이 ‘양을 사람으로 환생시켰다’고 해서 환양선사(換羊禪師)로 바뀌었다는 고사다. 훗날 선조(일설엔 숙종) 임금이 이 얘길 듣곤 절에 많은 시주를 했으며 ‘정토사’란 절 이름을 백양사(白羊寺)로 바꿨다고 한다. 종교엔 인간의 머리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이(神異)한 일들이 존재한다지만 닳고 닳은 머리론 뜬 구름 같은 얘기다.
영천굴엔 또 다른 얘기가 흐른다. 영천굴 안쪽 바위틈에서 수행하는 승려가 먹을 1인분의 쌀이 항상 나왔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와 승려는 식사대접을 위해 바위틈에서 2인분의 쌀을 얻으려고 막대기로 쑤셨더니 그 후론 쌀은 안 나오고 물만 나왔다는 이야기다. 쌀 같은 물을 많이 마신 탓일까? 배는 든든하다. 사찰엔 유난히 쌀 바위 전설이 많이 흘러 다닌다. 그만큼 절에서도 사바세계와 같이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승려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바깥세상이 모두 굶주리는 판에 절집이라고 사정이 좋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신(神)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학바위 중턱에 있는 영천굴에서 내려오다가 다시 우측으로 조금 오르면 약사암이 나온다. 약사암은 학바위 처마 끝에 제비집처럼 매달렸다고 이구동성 한 목소리다. 혹자는 약사암에서 내려다보는 백양사의 조망이 으뜸이라고 말하는데, 사월초파일을 기념하려는 연등이 주렁주렁 열렸으니 조망은커녕 암자 구경조차 시원찮다. 약사암이 유명한 것은 천길 낭떠러지기 암봉인 백학봉 기슭 양지바른 곳에 얹힌 자리 탓도 있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백양사 전망과 함께 수행자를 일찍 깨우치게 하는 기운 또한 높기 때문이란 말도 떠돈다. 누군가 환양선사가 양을 인간으로 환생시켜 정토사를 백양사로 부르게 한 곳도 영천굴이 아닌 옛 영천암이라고 불렸던 약사암이란 얘기도 들린다. 기록 또한 중구난방이니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머릿속이 어지럽다. 절마다 내세우는 주장이 다양한 건, 인간의 내재된 욕심이 선계(禪界)에서도 통함이라. 약사암에서 400여m를 내려가면 백양사다. 내려가는 급경사 길엔 잔돌이 가득하다. 숲 속엔 백암사의 자랑인 애기단풍 나무가 가득했다. 작은 잎으로 유명한 백양사 단풍나무, 가을에 오면 만산홍엽의 정취에 물들어 이를 보는 남녀노소 또한 모두 붉어질 노릇이다.
백암산 아래 백양사 주변 숲에서 가장 유명한 나무는 뭘까? 대개 가을단풍을 떠올리며 애기단풍 나무라고 말할 듯하지만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나무는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153호)고, 그 다음이 애기단풍나무다. 그 다음으론 고불매(백양사 내 400년 묵었다는 홍매화), 각진국사의 삽목설화가 전하는 700년 수령의 이팝나무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수령을 자랑하는 갈참나무라고 했다. 백양사 비자나무는 고려 고종 때 각진국사가 절간 승려의 구충을 위해 심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왕실과 조정에 공물로 바치기 위해 비자림을 더 크게 가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려 땐 구충제로 쓰기 위해 저 멀리 제주도 비자림에서 조정에 공납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비자나무와 애기단풍 사이로 들어오는 푸른 노을(청하 靑霞)을 즐기며 하산길이 여유만만인 양 두 팔을 휘휘 내젓던 중 눈길은 어느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 꽂힌다. 다가가 살펴보니 ‘국제기(國祭基·국가에서 제례를 올리던 터)’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위 아래쪽엔 반듯한 정사각형 돌담이 있어 들어가니 건물은 없고 제를 올리던 제단만이 높게 자릴 잡았다.
"국기단 앞엔 홍살문이 놓였으니 함부로 범접하질 못할 신성한 장소다. 옛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는 숭천사상, 산을 숭상하는 산악신앙, 일월성신을 신봉하는 칠성신앙과 각 명산대천에 제를 올리는 국사신앙을 갖고 있었다."
백양사 경내에 있는 국기단(國祈壇)은 ‘나라에 재앙이 있을 때 조정에서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던 곳’이란 안내판이 붙었다. 누군가 이곳에서 백학봉 학바위를 바라보며 제를 올렸다고 말하니 신라 이래 고려는 물론 조선까지도 산천에 대한 믿음은 우직했던 모양이다. 고려 때부터 국기단에서 제례를 드렸다는 말도 전하고 또 ‘정토사 사적기’엔 선조 36년(1603년)과 현종 2년(1661년)에 호남에 심한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자 조정에서 제사관으로 나주와 광주목사를 파견하여 인근 고을의 관원들을 제관으로 삼아 여제(厲祭·객사를 했거나 후손이 없어 제삿밥을 못 얻어먹는 귀신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인다. 옛 불교나 유교가 강성했던 시절에도 전래의 풍습대로 명산대천을 찾아 제를 올렸던 산천제는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전래의 풍속이 일제의 미신타파와 한국동란 후 몰아닥친 신교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여지없이 꺾여 버렸고, 지금은 문명의 이기와 무관심 속에 또 한풀 꺾였으니 옛 우리 선조들이 모시던 여러 신들께선 지금 무얼 잡숫고 어떻게 노닐고 계실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국기단 앞엔 홍살문이 놓였으니 함부로 범접하질 못할 신성한 장소다. 옛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는 숭천사상, 산을 숭상하는 산악신앙, 일월성신을 신봉하는 칠성신앙과 각 명산대천에 제를 올리는 국사신앙을 갖고 있었다. 고등종교인 불교가 도래해 온통 나라 안이 부처님의 나라가 됐을 때도, 유교의 성리학이 주체이념으로 자릴 잡았을 시절에도 조상님들은 명산대천에 제를 올리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개천절에 국조 단군왕검께 제례를 올리는 마니산 참성단 행사조차 일개 지방자치제의 행사로 전락했다.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께서 과연 우릴 어떻게 돌봐 주실지 걱정이 태산이다.
백양사 영지(影池)에 잠긴 백학봉
약사암에서 백양사까지 이어진 숲 속엔 비자나무와 애기단풍나무가 울창하고, 그 위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학바위의 위용 또한 대단하다. 백양사 경내로 들어서니 불자(佛者)인지 관광객인지 모를 인파로 고불총림 백양사가 왁자지껄하다. 백양사의 이름을 추적하면 1300여 년 전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신라 고승 여환 스님이 백암사(白巖寺)를 창건했고, 고려시대 덕종 3년(1034년) 중연선사가 중창을 하며 정토사(淨土寺)라 개칭한다. 그 후 조선 선조 7년(1574년) 지완 스님(훗날 환양선사)이 설법으로 양을 환생시킨 후 정토사를 백양사로 개명했다.
백양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게 연못 앞 이층 누각 쌍계루(雙溪樓)다. 쌍계루는 근래에 지은 누각이지만 초록빛으로 둘러싸인 풍광만은 옛 모습 그대로다. 쌍계루의 쌍계는 백학봉 좌우에서 흐르는 두 계곡을 의미한다. 두 계곡의 물이 합쳐지는 합수점이 바로 영지(影池)란 이름의 호수다. 두 계곡물이 합쳐지기 전 다리 위에 세운 누각이 바로 쌍계루다. 고려 말 정도전이 지은 ‘정토사 교루기(淨土寺 橋樓記)’의 ‘교루(橋樓·다리누각)’란 글자가 이를 증명한다. 백양사는 고려 말 정토사 시절 각진국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호남의 명찰로 인정을 받는다.
백양사 쌍계루 연못 가에 700살 수령의 이팝나무가 있다. 이팝나무는 1355년경에 각엄존자 각진 스님이 지팡이를 꽂아서 자란 나무라는 삽목설화가 전해온다. 1355년 각진국사가 이곳에서 입적하자 왕명으로 세운 각진국사비도 있다. 유명한 스님이 절 안에 지팡이를 꽂았더니 나무가 되더라? 의상대사 혹은 마의태자가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양평 용문사 1000년 은행나무, 의상대사와 영주 부석사 선비화, 자장율사의 지팡이였다는 함백산 정암사 주목(선정단), 도선국사의 이천 반룡송, 나옹화상의 지팡이였다는 안성 칠장사의 소나무 등은 사찰과 고승대덕들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쌍계루 앞 영지(影池), 말 그대로 그림자 연못이다. 영지에 파문이 생기는 걸 보니 소금장이가 그림자 학바위를 보고 저도 오르려고 뜀박질을 하는 모양이다. 쌍계루와 백학봉 학바위의 절경을 구경하는 포인트는 흐르는 물을 막은 보 앞 못 속 징검다리다. 파란 도화지 위에 주선(酒仙)이 만취해 흔들리는 붓끝을 놀려 풍경화를 그려 놓았다. 그 붓의 조화는 실로 하늘에서 내려준 대단한 솜씨였다. 눈을 들어 햇빛에 빛나는 백학봉을 바라보는 것 보다 물속에 잠긴 봉우리와 숲 그리고 누각을 투영해 보는 게 더욱 운치를 북돋는다. 이는 하늘이 도화지가 되어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풀이 물감을 잘 풀은 덕인지 아리송하다. 오늘은 영지에 담긴 백학봉과 쌍계루 더구나 하늘까지 품은 물 속 그림자까지 보았으니 백양사의 말대로라면 운수가 대통한 날이다.
백암산 동쪽 기슭 백학봉 학바위를 병풍 삼아 지은 백양사, 절 앞엔 맑은 옥류가 흐르고, 뒤론 바위산이 버티고 있으니 감여가(풍수가)들은 이곳을 보고 임산배수의 명당지혈(明堂之穴)이라고 말한다. 수행정진하는 도인이나 스님에겐 학바위가 엄청난 기운을 주고, 수행으로 달궈진 뜨거운 수행자의 열기까지 계곡물이 모인 영지가 식혀주니, 수행자의 자리치곤 최고란 생각이다. 백양사 입구에서 쌍계루에 이르는 포장된 산책로는 비록 자연스런 풍치는 사라지고 없지만 여느 절보단 절로 드는 기분을 절로 충족시켜 준다. 봄빛이 중천에 떠있는 날, 내장산 신선봉에서 백암산 상왕봉을 거쳐 백학봉과 백양사까지 마치 하늘과 땅의 순례길을 걸은 듯했다. 산하가 신록으로 물드니 마음 역시 겨우내 쌓인 두꺼운 외투를 걷어내고 가벼운 깃털이 된 하루였다.
,사진 전종현_산 이야기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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