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등산 자료☆★★/★☆ 등산 여행☆

한민족의 역사유산을 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산성산성이 있는 산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

한민족의 역사유산을 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산성산성이 있는 산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


   

,사진 이수인 객원기자_클럽8848대원

0001(남한산성은 성벽 전 구간에 걸쳐 체성 위에 여장을 둘렀다. 포술이 일반화된 조선 중기 이후의 전쟁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다.)
▲ 남한산성은 성벽 전 구간에 걸쳐 체성 위에 여장을 둘렀다. 포술이 일반화된 조선 중기 이후의 전쟁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다.


우리나라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남한산성에 대한 실사를 마치고 제출한 보고서 내용이 “등재 권고”로 확인되었다. 이코모스 보고서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최종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서, 6월 하순경 카타르 도하에서 열릴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의에서의 결과는 낙관해도 좋을 듯싶다.

이코모스가 남한산성을 실사하면서 적용한 세계문화유산 등록 요건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 완전성, 진정성 보존 관리 등의 여러 측면에서 모두 하자가 없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검토해 보니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에서의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써 문화유산이 확실하다는 점,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전술을 시대적으로 집적하며 결집한 초대형 포곡식 산성이라는 점,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보존관리를 해오고 있다는 점 등이 확인됐다. 즉, 세계문화유산의 등록 요건을 두루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면 진정 우리에게 경사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는 남한산성이 우리의 문화 역사적 자원으로만 평가되지 않고, 세계적 가치나 인류적 가치로 위상을 확장해 평가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0002(남한산성 안에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지휘소인 장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진의 수어장대는 성의 서쪽에 세워진 최고 지휘소였으며, 현재까지 그 모습이 남아있는 유일한 장대이다.)
▲ 남한산성 안에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지휘소인 장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진의 수어장대는 성의 서쪽에 세워진 최고 지휘소였으며, 현재까지 그 모습이 남아있는 유일한 장대이다.


남한산성이 지니고 있는 한국사적 가치

남한산성은 이러한 재조명 이전부터도 중요한 우리의 문화재였다. 예컨대 지금의 국립공원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얼마 후인 1954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정은 4.19 이후 들어선 장면 정부에 의해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1967년 제정된 공원법에 의해서 지리산이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20여 곳이 차례로 국립공원 목록에 이름을 추가하게 되는데, 아쉽게도 남한산성은 종내 이 지정에 끼어들지 못하다가 1971년 경기도에 의해서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렇다면 세계문화적 가치로 공인되기 이전의 남한산성은 과연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문화적 가치로 실감되었던 것일까. 경내에 분포된 지정문화재들을 파악함으로써 그 판단을 대신하도록 하겠다. 남한산성 자체는 1963년에 국가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중요성에 대해서 주목이 되었다는 뜻이다. 남한산성 행궁도 비록 산성보다는 늦었지만, 2007년에 국가사적 480호로 지정되었다. 더불어 수어장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 6개소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망월사지 외 1개소는 경기도기념물로, 지수당, 장경사는 경기도문화재자료로 각각 지정되었다. 남한산성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등록돼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도 그 가치를 비교적 온전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0003(산성 주차장에서 남문 쪽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비석군. 광주와 남한산성을 지키는 책임자들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 산성 주차장에서 남문 쪽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비석군. 광주와 남한산성을 지키는 책임자들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남한산성’ 하면 먼저 피부로 다가오는, 학술적 평가와 별 상관이 없는 원초적 충격이 존재한다. 바로 이 남한산성에서의 전투 끝에서 5천년 우리 민족사상 가장 치욕적인 항복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인식이다. 우리가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했거나, 그 패배로 인해서 항복한 것이 절대 아니다. 혹한이 천지를 덮었던 운명의 1637년 정월 그믐날, 삼전나루에서 조선 국왕 인조가 아홉 번씩 땅에 머리를 찧으며 청태종에게 비참한 항복의 의식을 올린 이유는,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는 아니었다. 성곽을 끼고 붙었던 피아간의 접전에서 우리의 방어는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이겨냈었다. 뛰어난 청나라 군대의 기동력도, 그들만 가지고 있었던 서양에서 들어온 가공할 대포의 화력도, 철옹성 남한산성의 방어력을 뚫지는 못했었다.


0004(남한산성의 서북쪽은 482.6m 높이의 청량산 자락을 깔고서 성벽이 이어진다. 그런 다음 성벽 흐름이 동북방향으로 꺾이면서 북문으로 이어지며, 이 지점의 산세가 북쪽 하남시 방향으로 계속 길게 흘러가므로, 465m 높이의 연주봉까지 옹성을 이어 쌓고 포대를 설치하였다.)
▲ 남한산성의 서북쪽은 482.6m 높이의 청량산 자락을 깔고서 성벽이 이어진다. 그런 다음 성벽 흐름이 동북방향으로 꺾이면서 북문으로 이어지며, 이 지점의 산세가 북쪽 하남시 방향으로 계속 길게 흘러가므로, 465m 높이의 연주봉까지 옹성을 이어 쌓고 포대를 설치하였다.


남한산성의 지리적 조건

남한산성은 크게 북서쪽 청량산(482.6m)과 남쪽 검단산(520m)이 만나는 줄기를 서벽으로 삼는다.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 남한산이니, 남한산성은 청량산에다 쌓은 산성인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남한산성은 서쪽 청량산과 동쪽의 벌봉(615m)으로 이어지는 줄기로 북벽으로 삼았다. 또 벌봉 못 미친 동장대지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동문에 닿는 부분을 동벽으로 삼았고, 또 청량산과 검단산 사이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남쪽 높은 능선을 남벽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남한산성의 대강 모양은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좀 짧은 장방형 모양이다.

병자호란을 겪은 다음, 조정은 동북단 벌봉을 에워싸는 형태로 봉암성을 새로 쌓았고, 다시 봉암성에서 한봉(418m)으로 이어지는 동벽을 추가했다. 그러니까 외성은 대략 남쪽으로 열린 항아리 형태를 이루면서, 내성의 동벽 밖에다 또 하나의 외벽을 세웠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동면에는 이중구조의 성벽이 세워진 것이다.

산성 성곽의 입지 자체는 400~500m 이상의 고지다. 그런 고지의 안쪽으로 우묵한 중심부가 형성되어 있다. 성곽에 의해서 보호되는 평탄한 공간인데, 이러한 입지를 다산 정약용의 이론으로 살피자면, 최고의 입지인 고로봉형(栲栳峰形) 산성에 해당한다. 성벽의 둘레가 내성만 연결해서는 9km에 이르고, 외성을 합치면 12km 정도에 이른다. 초대형 산성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런 규모라서 성벽을 따라 오르내리는 남한산성 산행은 충분한 운동량이 보장된다. 많은 문들을 이용해서, 성곽의 안과 밖을 바꾸면서 걸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성내의 지세를 조금 더 부연하면, 서쪽 수어장대 부근을 정점으로 성 중앙부를 지나며서 동쪽으로 긴 경사가 이루어진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중앙으로 모여서 지수당 등 집수지에 저장되었다가, 동문 옆 수구를 통해 성 밖으로 빠져 나간다. 80여 개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어서 성내의 수원은 풍부하다. 식량도 넉넉히 비축할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에는 그런 준비가 되지 못해서 겨우 45일 정도만 버텼다.

성 안의 면적은 598.195㎡로, 경사가 심한 비탈 지형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경작이 가능한 농지도 많다. 한창 때 이 성안에는 1000 가구, 4000여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또 평시 성 안의 기능 유지를 위해서 광주부 청사가 들어와 있기도 했고, 또 조선시대 5군영 편제 중 하나인 수어청이 들어와서 이 성을 방비하기도 했다. 이 산성의 훼손과 파괴가 가속되던 일제시대에 안에 있던 광주군청은 경안으로 옮겨갔다.

0005(남한산성은 이승만 대통령 정권 말기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하야 후 장면 정부에 의해 바로 그 지정이 취소되고 만다. 그러다가 1971년이 되어서 다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다. 사진은 도립공원 지정 후 보수작업을 하고 그 내용을 새겨 동문 근처에 세운 비석.)
▲ 남한산성은 이승만 대통령 정권 말기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하야 후 장면 정부에 의해 바로 그 지정이 취소되고 만다. 그러다가 1971년이 되어서 다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다. 사진은 도립공원 지정 후 보수작업을 하고 그 내용을 새겨 동문 근처에 세운 비석.


삼국시대에 기틀을 마련, 조선 인조 때 대대적인 개보수

남한산성의 고고학적 기원은 최소 백제시대로 소급된다. 산상 안에서 백제시대의 생활 흔적이 발굴된 바 있어서이다. 또 북쪽 연주봉을 통해 근거리로 이어지는 이성산성(二聖山城)이 백제의 고성이라는 점에서, 아울러 백제 초기의 유적들이 하남과 서울 송파구 지역에 골고루 퍼져있다는 점에서, 이 추리는 결코 허황하지 않다. 그러나 이 산성 내 출토 백제유물은 단순한 생활유물에 국한된 것이어서, 당대 축성되었다는 직접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성에 대한 소급은 부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문무왕 12년 기사로 늦춰진다. 이 기사는 삼국통일 전쟁 후 한반도에 그냥 눌러앉으려는 당나라의 야심에 반발하여 신라가 당과의 전면적 장기전을 대비하는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즉, 신라는 당시 신라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인력과 물리적 기술수준을 결집해서 주장성(晝長城)을 쌓는 대역사를 시작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당시의 정치적 관계와 관련되어 성벽의 기초가 쌓아졌다는 것과, 더불어 행궁지 발굴 과정에서 신라시대의 대형기와 등 유물들이 대규모로 발굴된 것과, 또한 주장성의 규모를 언급하는 기록이 오늘날 남한산성의 내성 규모와 거의 흡사하다는 점 등에서, 이 남한산성의 기원이 신라 주장성이라는 추정은 큰 설득력을 얻는다.
남한산성이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꾸준히 성곽 본연의 기능을 유지했다는 증거는 고려 때 몽고군의 내침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는 〈동국이상국집〉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 책에는 광주부사를 지냈던 이세화의 묘지명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1231년과 1232년 몽고군이 몰려와 이 광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을 때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물리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로, 이때 이 몽고군을 지휘했던 장수 살례탑은 인근인 용인 처인성에서 승장 김윤후에 의해서 사살되고 만다.

남한산성에 대한 역사적 무늬는 조선 인조 때에 집중되어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이때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전쟁 체험은 나중에 많은 문학 예술작품들을 탄생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예컨대 고소설 〈박씨부인전〉 이나 〈유충렬전〉, 〈임경업전〉 등, 또 김훈의 〈남한산성〉 같은 소설, 그리고 〈최종병기 활〉 같은 영화도 모두 이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1624년 신하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을 통해서 인조는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등극한 직후 일어난 이괄의 반란을 피해서 공주까지 피란하는 씁쓸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는 20여 년 전에 있었던 임진왜란 체험도 생생했을 것이다. 공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인조는 곧바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한다. 기존의 산발적인 행궁 규모를 능가하는 확실한 피난 행궁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조 2년(1626년)부터 2년간 대대적으로 실시된 남한산성의 수축의 계기였다. 이 공사는 그간 관리 보수에서 미흡함이 있었던 주장성을 전면적으로 리모델링하는 사업이었다. 수어사 이서(李曙)와 승군 도총섭 각성(覺性)이 축성 책임자가 되어 2년 여 만에 공사를 완료했다.

이후 남한산성은 병자호란(1637)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예컨대 인조가 나중에 치욕스런 의식으로 항복을 하기는 하지만, 공격과 방어라는 실제 전투상황에서는 이 남한산성이 끝까지 청에게 저항하는 근거지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만큼 이 산성의 방어적 기능은 탁월했다.


0006(백제의 시조인 온조왕과 남한산성 보축의 중역을 맡았던 조선 인조대 이서 장군을 배향 합사한 사당 숭렬전.)
▲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과 남한산성 보축의 중역을 맡았던 조선 인조대 이서 장군을 배향 합사한 사당 숭렬전.


산세를 따라가는 성벽의 용틀임
남한산성으로 승용차를 타고 진입하려면 동문 방향과 남문 쪽 산성터널을 통해서 진입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까 광주시 산성면 광지원리 쪽을 경유해서 동문 쪽으로 올라와 산성리 주차장으로 닿거나, 이보다 더 많이 이용되는 코스로 성남시 산성역에서 342번 산복도로를 타고 산성터널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이렇게 승용차를 이용하는 접근방법이 있는 반면에, 지하철 마천역에서 서문을 보고 올라오는 접근이나, 하남시 쪽에서 북문을 보고 올라오는 접근방법도 있다.

기자는 성남시 산성역을 경유, 342번 도로를 따라 산성터널을 통과해서 산성리 주차장에 닿았다. 산성 답사 코스로 도립공원 측에서 안내하는 다섯 개 탐방로가 있다. 기자는 내성을 완전히 한 바퀴 도는 5번 코스에다 봉암성 일부를 둘러보는 것을 추가해서, 가능한 큰 둘레로 산성을 답사하였다. 행궁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먼저 남문으로 올라간 다음, 거기서 성곽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려니 주차할 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찾아온 인파가 많았다. 계절 자체가 손님들이 많을 때였지만, 어쩌면 세계문화유산 등재 임박이라는 뉴스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문득 남쪽 길가 언덕배기로 30여기의 비석이 ‘ㄷ’자 대형으로 대열을 이루었다. 둘러보니 이 산성을 지킨 역대 인물들의 공덕비이다. 길을 더 이으니 이윽고 남문인 지화문에 도달한다. 지화문은 남한산성에 세워진 4대문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성문 위로 날랜 처마선이 뚜렷하고, 문루 아래로 뚫린 홍예문이 시원하다. 문루에 오르니 문 바깥쪽 풍경이 시야를 압도하는데,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점차 낮아지는 너른 대문 앞 지형을 보완하여 성문을 차폐할 목적으로 심은 노고목들의 위용이었다.

문루에서 내려와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가려니 초반부터 경사가 만만치 않다. 체성은 예외 없이 모두 여장을 올리고 있어서, 여장에서 여장으로 길게 꼬리를 물며 꿈틀거린다. 지형에 맞추어 계산된 성체의 꿈틀거림은 그 자체가 예술이다. 더불어 성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이어지는 길의 연결도 아름답다. 성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송파 쪽의 조감은 또 얼마나 시원한가. 시선이 한강을 지나 남산을 통과하고도 멈추지 못한다.


0007(남문인 지화문을 밖에서 바라본 모습. 문밖에 수령 몇 백년되는 노거수들이 많은데, 적의 정탐을 최대한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식재된 것이다.)
▲ 남문인 지화문을 밖에서 바라본 모습. 문밖에 수령 몇 백년되는 노거수들이 많은데, 적의 정탐을 최대한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식재된 것이다.


남한산성의 시설들

퇴락해서 수리를 기다리는 영춘정을 지나니 곧 수어장대와 마주친다. 성의 정상부인 서쪽에 배치했던 최고 지휘소 시설이다. 5개의 성 안 장대 중에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보존된 시설이기도 하다. 2층으로 올라간 누각에 붙은 ‘守禦將臺(수어장대)’ 현판 글씨가 매우 인상적이다. 정조 연간의 대신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 옆으로 ‘無忘樓(무망루)’ 현판을 간직한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 현판은 애초에 수어장대 안쪽에 걸려있었던 것이라 한다. 청에게 굴욕 당한 아픔을 결코 “잊지 말라”는 당부이며 다짐일 것이다. 그 반대쪽에는 청량당이 자리하고 있다.

청량당은 인조 2년 이 성을 수축할 당시 억울한 오해로 죽임을 당했다는 이회 장군과, 그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삼전나루에서 투신한 송씨 부인 등의 영혼을 위로하는 곳이다. 성곽길을 계속 이어가면 서문인 좌익문이 나타난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본진이 있었던 산 아래 평지인 거여동 마천동 쪽이나, 항복 의식을 진행했던 송파 삼전나루 등과 최단거리로 이어지는 문이다. 서문을 지나면서, 산세가 이어가는 성 밖 북쪽으로 길쭉한 모양의 옹성이 나타난다. 연주봉 옹성이다. 옹성의 위치는 금암산을 거쳐 이성산성까지 이어지는 산줄기 위의 돌출된 봉우리다. 옹성의 길이가 아주 길지는 않으나, 끝부분에는 단을 높이고 포루를 세웠다. 북쪽 전체를 조감하면서 다가오는 적의 움직임을 제압할 수 있게 하였다.


연주봉 옹성에서 다시 성 안으로 복귀하면, 송림과 어우러진 성벽이 군사시설인지 설치미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숨바꼭질 하듯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파손된 작은 초소(군포) 터 흔적을 지나고, 또 몇 개의 암문을 지나고, 다시 북장대 터와 만난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북문인 전승문을 만난다. 전승문은 산자락이 아닌 골짜기를 타고서 하남시 사창동, 항동, 춘궁동 쪽 이어가는 통로가 된다.

전승문을 지나 또 한참을 가면 동장대 암문이 나온다. 봉암성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는 곳이다. 동장대암문을 타고 나가면서 바로 들어가게 되는 봉암성은 병자호란 후에 추가로 쌓은 남한산성의 외성이다. 본성의 북동쪽으로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 벌봉(615m)을 포함하여 두르는 모습으로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현재 이 성의 보존 상태는 본성보다 훨씬 취약하다.

0008(성벽의 중요부를 꺾거나 돌출시켜서 성벽의 방어력을 높이는 치성(雉城) 또는 곡장(曲墻) 부분과, 은밀한 출입을 위해 설치한 암문(暗門).)
▲ 성벽의 중요부를 꺾거나 돌출시켜서 성벽의 방어력을 높이는 치성(雉城) 또는 곡장(曲墻) 부분과, 은밀한 출입을 위해 설치한 암문(暗門).


외세의 공격을 막아낸 남한산성

병자년 당시 청군은 난공불락의 남한산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예컨대 성 안을 감제할 수 있는 벌봉과 남쪽 검단산 정상부 등에 포대를 구축하고, 서양에서 막 들어온 막강 화력의 홍이포로 성안을 포격하였다. 최대사거리가 4km에 달하는 이 신무기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 조선이 보유했던 천, 지, 현, 황 화포들보다 월등한 위력과 사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벌봉에서 쏜 포탄이 행궁 주변에서 터지는 일이 벌어졌고, 성안에 고립된 조선군에게는 실제적인 피해보다 훨씬 더 큰 심리적 타격을 안겼다고 전한다.

전쟁이 끝나자 조선은 항복문서를 통해 청과 약속한 합의를 어기며 신속하게 이런 문제점들을 보완한다. 이전에 미처 착안하지 못했던 남한산성 주변의 전술적 고지에 든든한 성이나 보루를 쌓아 본성의 기능을 보완해 나갔던 것이다. 때문에 청으로부터 몇 차례나 철거 압박을 받았다. 청나라 사신이 직접 철거작업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조선이 얼마나 기민하게 전술적 적응력을 보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기자는 봉암성을 대략 둘러본 다음, 남으로 이어지는 한봉성 답사는 포기하고 본성으로 복귀하였다. 이제 동장대 터를 기점으로 성벽은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곧 장경사지 신지옹성이 보인다. 장경사 우측 경사를 이룬 성벽 밖으로 길쭉하게 성벽을 이어 붙여서 설치한 옹성이다. 이 옹성도 역시 병자호란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벌봉과 한봉이 적에게 함락되었을 때를 예상하여 대응 포격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시설이다. 옹성을 나와 조금 더 내려오면, 성내에 있는 10여개 사찰 중에서 가장 옛 모습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는 장경사와 만난다.

장경사를 지나서 곧 동문과 만난다. 동문은 북문과 대응되는 만큼 현판에 좌익문이라 새겨져 있다. 동문은 과거 성안으로 들어오던 대부분의 물품이 통과하던 곳이다. 문이 서있는 위치가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술적인 목적에 따라 문 아래로 몇 층의 계단을 설치했기 때문에, 마차 같은 교통수단의 통행은 불가능 했다고 한다. 그러니 성안으로의 물품 유입은 주로 지게에 의존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이것을 문제 삼아 동문 남쪽 구간의 성벽을 끊어 신작로를 내버렸다. 아울러 성문도 파괴하였는데, 해방 후 1973년이 되어서야 남아있던 주추를 살려 새로 성문을 복원했다. 그러나 성문에서 서쪽으로의 성벽 연결은 여전히 절단 및 파손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동문 옆에 뚫려있는 342번 도로는 이렇게 일제에 의해서 뚫린 길이다.

동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구간의 성벽은 모양이 더욱 견실하게 보인다. 성벽의 기울기나 벽면의 맞물림이 아까 지나온 구간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성벽의 구불거리는 정도는 다소 약해진 반면에, 암문과 옹성 등의 집중적인 배치로 성벽이 한층 단단하게 느껴진다.

남면에 나란한 3개의 옹성은 크기나 모양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모두 같은 목적을 위해 설치된 것이다. 성벽 밖 낮은 골짜기를 지나자마자 다시 솟아버리는 검단산 정상부로부터의 감시나 타격을 본성의 앞쪽에서 완충하고 차단하려는 목적이다. 대응은 이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검단산 정상부에는 신남성 또는 남격대로 불리는 두 개의 진지를 새로 설치했으니, 유사시 성에서 빠르게 병력을 파견해서 선점함으로써 전초기지로 전환하는 묘안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비록 병자호란 마지막에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선의 지리멸렬이나 자포자기가 결코 아니었다. 굴욕을 참으면서 발견된 취약점을 극복해간 속 깊은 대응이었던 것이다.

산성 안에는 앞서 열거한 대로 여러 유형의 문화재들이 산포되어 있다. 다 언급하기가 버거우니 행궁(行宮)과 현절사(顯節祠)만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행궁은 서울에 있는 정궁을 대신하기 위해서 세우는 왕의 별궁이다. 대개는 비상상황을 대비하여 건설한다. 그러나 비상시라도 국왕의 위엄과 통치는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행궁은 언제나 주변에 세워지는 모든 시설물의 중심에 배치된다.

행궁에 딸리는 중요시설은 종묘와 사직이다. 조선의 왕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복수의 행궁을 운영했으나, 이렇게 종묘와 사직을 함께 설치했던 행궁은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한산성 안에는 사직단의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청에 대항하자는 입장에 섰던 척화파 3인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 3인은 청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대표적 척화파들인데, 조선이 항복한 이후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 현지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이 사당을 세운 것인데, 나중에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 information

0009()


교통
승용차를 이용해서 남문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잠실에서 복정4거리와 덕진로를 거쳐서 산성으로 들어온다. 경부고속도로 양재IC에서 세곡동과 약진로를 거치고 산성터널을 통과하여 들어와도 된다. 수원-분당-모란-성남시청을 지나 산성으로 들어오는 것도 가능하며, 외곽순환도로와 성남IC를 경유하는 방법도 있다.

만약 동문을 경유해서 광지원 쪽에서 성으로 들어오고자 한다면, 천호대교-길동을 이어 43번 도로를 탄 다음, 광지원에서 들어오면 된다. 중부고속도로 경안IC 광지원을 거치는 방법도 가능하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방법은, 5호선 마천역에 내린 다음 1번 출구를 통해 산성 서문으로 올라올 수 있다. 또 8호선을 타고 산성역에서 내린 다음 2번 출구에서 9, 52, 9-1 번 버스를 타고 산성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사진 이수인 객원기자_클럽8848대원  
<저작권자 © mountain,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부동"

에게.... 

"세무" 세무사에게   "회계" 회계사에게   "건축설계" 건축사에게...전문가에게 상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