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선(儒佛仙)이 함께 어우러진 산, 천관산[이야기가 있는 산하] 전남 장흥 천관산(天冠山)·723m
,사진 전종현_산 이야기 연구소 소장
천관산을 일컫는 많은 이름 중에 “능선의 바위 봉우리들이 마치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면류관과 비슷하여 천관산이라고 했다”는 유래가 가장 그럴 듯하다.
관산을 지칭하는 이름들은 무수히 많다. 천관보살이 살고 있어 ‘지제산(支提山)’ 하늘에서 내려온 봉황이 날개를 접고 쉰다고 하여 ‘천풍산(天風山)’ 가끔 흰 연기 등 상서로운 서기를 내뿜는다고 하여 ‘신산(神山)’ 등으로 불린다. 한편 인근 주민들은 다른 이름이 필요 없다며 ‘큰산’이라고도 불렀고, 북편에 솟은 관음봉의 형상과 89개의 암자 그리고 많은 고승을 배출한 산이란 의미로 ‘불두산(佛頭山)’이라고도 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돌 모양이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산 위에 항상 자줏빛 구름과 흰 구름이 떠있다”고 천관산을 기술했다. 이처럼 천관산을 일컫는 이름이 많지만, 그중 “능선의 바위 봉우리들이 마치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면류관과 비슷하여 천관산이라고 했다”는 유래가 가장 그럴 듯하다.
부처님이 계신 신령한 곳
천관산 산행은 장천재에서 시작된다. 장천재 앞 계곡의 이름이 장천(長川)으로, 아마 ‘큰골’이나 ‘긴골’을 한자로 표기한 듯하다. 장천재 방문을 빙자해 유자(儒者)들이 계곡 암반에 앉아 시 한 수에 술 한 잔을 걸쳤을 멋진 풍광이 나타난다. 와룡홍, 청령뢰, 추월담, 명봉대, 세이담, 도화량, 백설뢰, 청풍담 등 ‘장천 8경’을 안주 삼아 음풍농월을 즐겼던 옛 풍류객들의 한가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장천재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존재 위백규 선생(1727~1798)이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원래 사찰인 장천암 터다. 조선 중종 때 강릉참봉 위보현이 장천동에 어머니의 묘각을 짓고 장천암을 원찰로 삼았으나, 효종 때인 1659년 위씨들이 암자를 폐하고 이곳에 재실을 지었다. 존재 선생은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수학하고 훗날 자신도 이곳에서 후학을 길렀으니, 장천재는 장흥 위씨들의 서원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평생 은자(隱者)로 지내며 90여 권의 책을 썼는데, 우연히 그의 저서를 받아본 정조가 그의 나이 69세에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장천재를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자 불쑥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바위에 오르니 산행 들머리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전망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불교에서 천관산을 일러 “부처님이 계신 영산(靈山)”이라 추앙하고 있지만, 천관산을 거론할 때 도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하늘의 면류관’ 운운은 도교에서 말하는 옥황상제를 의미하기 때문. 도교를 수행하는 도인들의 목표는 불로장생 신선이다. 이 땅의 산봉우리 이름들은 주로 종교적 색채를 띠는데, 처음엔 우리 고유한 문화나 신앙적 숭배 대상이 봉우리의 이름으로 정해졌을 것이다. 그런 이름들이 차츰 도교적 이상주의 색채를 띠었고, 그 후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아마 불교적 색채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산의 봉우리 이름 중 선인봉이나 신선봉 등이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 역시 도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청학봉, 학봉, 학소대, 청운봉 등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전망대 바위를 지나 만난 선인봉 또한 신선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었던 곳이란 전설이 있다. 선인봉에 오르면 능선 위로는 아홉 봉우리(구정봉)가, 산 아래론 관산벌과 다도해가 보인다고 했는데, 취재 당일엔 뿌연 안개가 자욱해 바다 쪽 조망은 난망이다.
선인봉을 돌아 오르면 능선 상에 기암괴석이 하나 나오는데, 마치 하늘을 향해 불끈 솟은 남근(男根)의 모양이다. 선돌은 남근석 혹은 양근암(陽根岩), 미륵바위, 신석(腎石)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주로 아기의 잉태를 기원하는 기자속 풍속의 기자석(祈子石)에 해당하는 바위토템이다. 봉황봉 능선 상에 있는 양근암은 금수굴 능선에 있는 금수굴과 음양의 조화를 맞춘 것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저 기자석의 짝은 어디 있을까?
바위봉우리 보는 맛이 쏠쏠하더라
종봉을 향해 오르다보니 천관산 주능선이 보이면서 능선 끝 연대봉(723m) 정상엔 봉수대가 놓였다. 천관산 주능선은 대장봉 환희대에서 연대봉까지를 말하는데, 그 일대엔 나무가 한 그루도 보이질 않는다. 실제 주능선에 오르면 나무는 별로 없고 억새들만 너울거리는데 그 사연을 들으니 기가 막힌다.
고려 고종 임금은 40년간(1231~1270)의 대몽항전을 끝내고 태자(훗날 원종)를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에게 보내 입조시키며 항복을 했다. 원종 14년(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제주도에서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자, 원나라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에 나서면서 고려 조정에 여몽연합군을 실어 나를 900척의 전선을 건조하라 명한다. 이 때 900척의 배를 만들기 위해 공급된 나무가 바로 부안 변산과 장흥 천관산의 소나무였다. 당시 선박을 만들었던 조선소가 합포(현 마산)와 장흥에 있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으로 천관산 주능선 상엔 약 800년이 지난 지금도 나무는 볼 수 없고 억새만 가득하다.
종봉을 지나 오르자 ‘인자하거나 혹은 쭈글쭈글한 늙은 승려의 얼굴형상’의 바위인 노승봉老僧峰이 나타났는데, 안내판에는 “돌로 만든 석선石船”이라고 적혀 있다.
종봉을 향해 달음질할 때 비석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에 살던 산신과 신선들의 행적을 적어 놓은 사적비라면 옳을까?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새겨진 흔적들이 모두 마멸됐는지 아니면 비바람의 흔적만이 신들의 표기법인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종봉 하단엔 금강굴이 있고 그 안엔 석간수가 흐른 자국이 있지만 지금은 메말라 있다. 종봉에 올라 주능선 쪽을 바라보니 천관산 명경(名景) 중 최고의 풍광이 펼쳐진다. 아홉 개의 바위봉우리가 모여 하나의 군을 이룬 구정봉(九頂峰, 685m)이 바로 그것. 구정봉은 주능선과 지장능선 그리고 천관산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흩어져 있는데, 각각의 봉우리 이름은 대장봉, 천주봉, 보현봉, 대세봉, 선재봉, 관음봉, 신상봉, 홀봉, 삼신봉이다.
천관산 주능선에 다가갈수록 바위봉우리를 보는 맛이 쏠쏠해진다. 종봉을 지나 오르자 ‘인자하거나 혹은 쭈글쭈글한 늙은 승려의 얼굴형상’의 바위인 노승봉(老僧峰)이 나타났는데, 안내판에는 “돌로 만든 석선(石船)”이라고 적혀 있다. 노승봉 위에 올라가 동편을 바라보면 하늘로 힘겹게 오르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세상만물이 모두 소망하는 바를 하늘에 고하고자 산 정상을 향하는 듯하다. 거북바위 뒤로 관산읍과 남해바다가 희미하게 보인다.
천관사에서 오르는 능선과 종봉에서 오르는 능선이 맞닿은 곳에 대세봉이 놓였다. 우람하고 헌걸찬 모습에서 강한 바위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기운을 받아선지 단단한 바위에 뿌릴 내린 철쭉이 꽃을 활짝 피웠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바위들이 무리를 이루는데, 그중 구름 속에서 하늘을 괴고 있는 듯한 형상의 천주봉(天柱峰)이 압권이다. 안내판에는 “불가에선 깃발을 달아 놓은 보찰(寶刹)이라고 불렀고, 산동 사람들은 금관봉(金冠峰)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이 있다. 천관산 바위봉우리 안내판마다 산동(山東) 운운하는 걸 보면, 혹 고려시대 남송 사람들이 이곳에 들려 당시 해안가 사람들에게 지식을 자랑하며 우리 산하에 각종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기우제를 지내고 봉화를 피워 올리다
천관산의 정상은 봉수대가 있는 연대봉이지만, 예부터 천관산 제일봉은 진죽봉 능선 상의 구룡봉(九龍峰, 675m)을 꼽았다. 9마리의 용이 승천한 곳, 용들이 승천할 때 찍어 놓은 발자국의 흔적이라는 돌우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곳,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기우제나 기한제를 올렸던 곳 등등의 소문이 구룡봉을 더욱 신비스럽게 만든다. 이곳 뿐 아니라 포항의 구룡포, 치악산 구룡사, 영월과 봉화의 구룡산 등 용을 거론할 땐 항상 9마리를 들먹이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돌우물인 용알터에서 풍성한 수확을 빌었으니 아무래도 풍요를 의미하는 신앙과 연관된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이 갈 뿐이다.
대장봉 환희대(歡喜臺, 720m)에 산행객들이 올라 한쪽에선 기념사진들을 찍느라 또 다른 쪽에선 모여 앉아 주변 전망과 담소를 즐기느라 왁자지껄하다. 혹자는 환희대를 일러 ‘가파른 산길을 올라 이곳에서 한숨을 돌리며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 절로 환희심이 인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성취감과 큰 기쁨을 맛보라’는 권유적 의미를 품은 것이라고도 했다. 내 소견으론 <대장경> 등에 나오는 불교적 어휘로 접근하는 게 옳은 듯하다. 경전 속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수행을 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환희심이 솟구쳐 사바세계의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버리게 되어 열락의 세상에 들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환희대는 대장봉 위 평평한 바위 반석으로 ‘책 모양의 바위들이 서로 겹쳐 마치 만권의 책을 쌓아 놓은 듯하다’고 했다. 불교에선 그 책을 석대장(바위로 만든 대장경)으로 표현한다. 천관산에서 언젠가 종교전쟁이 일어나 결국 불교가 승리했음을 알려주는 방증이다. 물론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불교의 색깔을 지우려 노력했겠지만, 천년이 넘는 불교적 색채가 단숨에 지워지진 않았을 일이다.
주능선 위에는 장흥군 관산읍과 관산벌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는데, 그 바위 위엔 돌우물인 용알터가 있다. 예전 가뭄이 들면 천관산 산정에 올라 신성한 바위에 용알을 만들어 기우제를 지낸 후, 정상 주변에 혹 묘지를 쓴 곳이 없는가 살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기우제를 지내는 산에 묏자리를 쓰면 가뭄이 든다는 속설 때문에 한발이 심해지면 조상의 묏자리를 쓴 집과 마을사람들 간에 잦은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묘를 써서 화기(火氣)를 북돋워 수기(水氣)를 말렸다는 속설 때문이다.
천관산 연대봉의 봉수대는 고려 의종 때 쌓은 것으로, 왜구들이 침범할 때마다 봉화불이 올랐던 곳이다. 이곳 봉화대는 장흥 억불산(510m)과 병영의 수인산(561.3m)과 교신하며 제주와 강진을 오가던 신호를 이어줬다. 무너져 폐허가 된 봉수대를 1980년대 중반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축성했다고 전한다. 연대봉 봉수대에 올라 전후좌우를 살피니 속이 시원할 만큼 사방이 뻥 뚫렸다. 시원한 전망을 원한다면 ‘봉화봉’ 또는 ‘봉화산’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에 올라갈 일이다.
연대봉에서 하산할 봉황봉 능선을 바라보니 나무 한 그루 없는 꼴이 참으로 황량하다. 가을이면 억새라도 바람결에 은빛물결을 날릴 일이지만 초여름 날에 어찌 그런 호사를 바라랴. 호남 실학의 대가이자 장흥지방 호족인 위백규는 <지제지>에서 “큰 액운이 겹쳐 사람 보기 힘들고, 형태도 변하여 여든아홉 암자는 하나도 없다”며 천관산의 황량함을 애달파 했다. 그가 이런 글을 남긴 연유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잦은 왜구의 약탈로 폐허가 된 장흥을 일컬음이다.
수많은 전설을 품은 남도의 명산
지나온 능선을 돌아보니 대장봉, 천주봉 대세봉 등 구정봉 바위군과 종봉이 산등성이를 따라 아득하게 보인다. 하늘나라의 면류관을 썼다는 천관산. 면류관은 국가의 큰 행사 때나 쓰던 왕의 예모로, 하늘의 면류관을 썼다면 우주를 관장하는 절대권자란 의미다. 80여 개의 바위 봉우리들이 각 능선을 따라 주옥처럼 열 지은 모습이 마치 옥구슬을 늘어뜨린 옥황상제의 면류관과 같다고 하여 천관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남쪽 바닷가에 있는 산치고 한반도 최고의 찬사를 받은 셈이다.
천관산에는 여러 위인들과 연관된 전설도 많다.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조정실세로 떠오른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전국 명산을 다니며 산신령에게 자신의 앞날을 열어달라고 기도한다. 대부분의 산신이 절대적 지지를 보냈지만 천관산 산신만은 “절대 안 된다”며 이성계의 청을 거절했고, 이에 화가 난 이성계는 천관산을 바다 건너 흥양(지금의 고창)으로 귀양을 보냈다. 천관산 뿐 아니라 지리산, 광주 무등산, 사천 와룡산 등의 산신령도 그의 청을 거절했지만 그 중 천관산만 유일하게 귀양을 갔다. 흥양으로 보낸 이유는 그곳이 고려시대엔 천민부락인 부곡(部曲)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옛 어느 기록엔 ‘흥양의 천관산’이라고 표기한 곳도 있다.
80여 개의 바위 봉우리들이 각 능선을 따라 주옥처럼 열 지은 모습이 옥구슬을 늘어뜨린 옥황상제의 면류관과 같다고 하여 천관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곳에는 김유신과 천관녀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머니의 질책에 자신이 아끼던 말의 목을 쳐 의지를 굳힌 김유신은 다시는 천관녀의 집을 찾지 않았다”로 끝나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러브스토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파한집>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 속편이 천관산에서 이어져 “김유신에게 버림을 받은 천관녀가 경북 월성군 내남면에 암자를 짓고 숨어 살면서 김유신의 성공을 기원한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김유신이 천관녀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 함께 경주로 가자고 권했지만, 천관녀는 청을 거절하고 홀연히 떠난다. 김유신이 뒤를 좇았으나 장흥 천관산에서 그 흔적을 놓쳤고, 이후 천관산엔 천관보살이 산다는 소문이 났다”고 끝을 맺는다.
연대봉에서 봉황봉 능선 방향으로 10여 분 내려오면, 옛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처럼 생긴 ‘관모암(冠帽岩)’이란 바위를 만난다. 그리고 곧 부잣집 뜰에나 놓여질 ‘정원석(庭園石)’이란 이름을 가진 바위도 나타난다. 정원석은 창덕궁 후원 연경당의 조경석인 ‘괴석’을 확대해 놓은 모습이다. 이름 그대로 기이하게 생긴 괴석은 연경당을 꾸미는데 일조한 정원석이다. 천관산 정원석 또한 천관산의 풍광에 일조를 한다.
봉황산 기슭에 위치한 양근암(陽根岩)은 일종의 남근석으로, 자녀가 없거나 아들을 못 낳는 옛 아낙들이 이곳에서 기원을 드렸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오늘도 한 여성이 간절한 바람을 양근암에 불어 넣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띤다. 세상 속 모든 사물엔 음양의 짝이 있듯, 양근암의 짝은 맞은 편 금수굴 능선에 있는 금수굴이다. 금수굴과 양근암을 짝으로 맺어놨지만 서로가 조화로운지 알 도리는 없다.
산행의 끝머리에 있는 문바위는 하늘나라 옥황상제님께 배알을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가는 하늘나라 최후의 관문이자, 지상에서 하늘로 통하는 최초의 관문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에 서있는 바위다. 저 바위 문을 지나면 인간세상이 나타나고, 저 문을 지나 오르면 하늘세상인 천계가 나타난다. 천관산이 ‘신선의 나라’요, ‘용의 나라’니 하늘과 땅을 가르는 통천문(도교에서 말하는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문)을 세워 놓은 모양이다.
,사진 전종현_산 이야기 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mountain,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부동산"은 공인중개사에게.... "세무"는 세무사에게 "회계"는 회계사에게 "건축설계"는 건축사에게...전문가에게 상담을... |
'★★☆ 등산 자료☆★★ > ★☆ 등산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름이 전하고 바람이 일러주는 이야기, 백암산전북 장성 ·정읍 ·순창 백암산 ·741m (0) | 2016.02.16 |
---|---|
한민족의 역사유산을 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산성산성이 있는 산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 (0) | 2016.02.16 |
그랜드 캐니언이 파주에도 있더라전철로 가는 근교산 ⊙ 경의선 월롱역·월롱산(218.5m) (0) | 2016.02.16 |
기암으로 쌓아올린 옹골찬 바위산, 불암산전철로 가는 근교산 ⊙ 경춘선 갈매역·불암산(508m) (0) | 2016.02.15 |
세월에 허물어진 성(城)을 찾아서·· 동해시 두타산성역사적 흔적이 깃들어있는 중부 영동을 대표하는 초대형 산성 (0) | 2016.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