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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허물어진 성(城)을 찾아서·· 동해시 두타산성역사적 흔적이 깃들어있는 중부 영동을 대표하는 초대형 산성

세월에 허물어진 성(城)을 찾아서·· 동해시 두타산성역사적 흔적이 깃들어있는 중부 영동을 대표하는 초대형 산성 


  

사진 이수인 객원기자_클럽8848대원

0001(무릉계곡과 두타산 최북단 자락이 만나는 험준한 암벽 위에 두타산성의 북쪽 출입문이 자리 잡고 있다. 성문은 처음부터 없었을 듯하다.)
▲ 무릉계곡과 두타산 최북단 자락이 만나는 험준한 암벽 위에 두타산성의 북쪽 출입문이 자리 잡고 있다. 성문은 처음부터 없었을 듯하다.


두타산성은 중부 영동을 대표하는 초대형 산성이다. 따라서 두타산성이 갖는 가치는 굳이 통계 내고 종합하지 않아도 뚜렷할 수밖에 없다. 산성의 축성 유래가 그렇고, 위치나 규모가 그러하며, 산성이 겪었던 여러 번의 전쟁이 또한 그러하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성의 자취가 모두 이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금 두타산에서 두타산성을 만날 수 없다. 산성 같은 산성, 든든한 철벽 요새로서의 산성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이나 전남 담양의 금성산성 같은 우아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안쓰럽고 심란한 마음으로 묵묵히 성곽의 자취를 쫓아야 한다.

두타산성은 분명히 두타산 북쪽 산록에서 마름모꼴 윤곽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설익은 눈매로 살펴보아도 두타산성 자체는 이지러졌지만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것이다. 내성과 외성을 합친 전체 둘레 6.5km의 규모로, 성문이나 망루 여장 등의 치장은 모두 잃었지만 노쇠한 산성의 윤곽으로 쓸쓸히 남아있는 것이다. 성벽을 온전히 지니고 있지 않다. 원형을 유지하면서 단 10m를 이어간 구간이 없다. 성문이나 망대의 제대로 된 모습은 한 군데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원래의 규모나 형식 정도를 겨우 짐작하게 해주는 무너진 흔적만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경사를 따라 성벽이 기울며 띠 모양으로 흩어져버렸거나, 급경사 절벽 아래로 쓸려 내려서 고작 돌무더기로만 남아 있는 곳도 많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행객들의 발길이 무너진 성벽이나마 옆으로 두고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성벽 안에서 성벽 밖으로, 또는 그 반대로 온통 헤집고 넘나들 수밖에 없어서 옛 유적을 접하는 마음이 불안하기만 하다. 아예 무너진 성벽 중심부로 돌을 다져 밟으며 등산로가 이어지는 곳도 있다.

0002(병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믿기는 곳이 바로 두타산성의 북쪽 출입구 부분이다.)
▲ 병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믿기는 곳이 바로 두타산성의 북쪽 출입구 부분이다.


참혹한 전장이었던 두타산성
두타산성을 답사하며 느낀 쓸쓸함과 안타까움은 사실 산성이 지금 모습으로 변하게 된 역사적 계기, 즉 파괴와 훼손의 시발점이 언제인가로 초점이 모인다. 두타산성이 지금처럼 피폐한 형상으로 바뀌게 된 내력을 따져보자.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 영동지방은 처음에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일본군의 주력이 한반도의 중앙부 조령을 통과해서 충주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전란에 대해 대비가 없었던 국왕 선조는 급히 의주로 몽진하였고, 왜군은 한양을 거칠게 약탈한 다음 왕의 이동을 쫓아 다시 평양 쪽으로 주력을 붙인다. 그러면서 원산과 함흥 등 함경도 방향으로도 병력을 나누는데, 바로 이 병력에 의해서 근왕병을 모집하러 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이 포로로 잡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명나라 구원병이 조선에 파병되는 상황이 되고, 이어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서 평양성 탈환이 이루어진다. 그럴 무렵 이 전쟁의 주동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에서 죽고, 이러한 전황 변화에 따라서 함경도에 진출했던 왜군은 영동지방 해안선을 따라서 남쪽으로 후퇴한다. 이때에 병력을 지휘한 왜장은 모리 요시나리였고, 두타산성 전투는 이렇게 남하하던 왜군들이 두타산성에 피란해 있던 관군과 의병과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산성도 파괴해버린 피의 전투였다.

전투 초기 왜군의 공격은 해안 쪽에서 무릉계곡을 거슬러 두타산성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결과는 왜군의 연전연패였다. 험준한 산세에 의지한 두타산성은 말 그대로 철옹성이었던 것이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무릉계곡을 통해 올라오는 적의 기동은 언제나 요지를 선점한 성 안 병력에 의해서 손쉽게 제압되곤 하였다. 심지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가파른 절벽 위에 허수아비를 세워서 병력 수를 과장하는 기만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왜군들은 초반에 그러한 기만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전연패하던 왜군들이 어느 날 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노파를 잡아 두타산성 방어의 취약점을 찾아내고 말았다. 공격이 불가능한 무릉계곡을 포기하고, 수비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정선 쪽으로 우회하여, 이기령과 중봉을 넘어 은밀하게 산성의 측후면을 치는 방략을 알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0004(두타산성의 축성기법이 추측되는 부분. 천연의 바위 위에 옮겨온 돌들을 강회로 접착력을 보강하면서 최대한 견고하게 남은 것으로 짐작된다)
▲ 두타산성의 축성기법이 추측되는 부분. 천연의 바위 위에 옮겨온 돌들을 강회로 접착력을 보강하면서 최대한 견고하게 남은 것으로 짐작된다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두타산성은 마침내 왜적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성 안에 있던 군인과 민간인을 합친 2000여명의 조선인은 왜군의 잔혹한 보복으로 전멸 당했다(어떤 자료에서는 이 때 죽은 사람들 수를 왜군 4500에 조선인 4000이라고 밝혔다). 이 최후의 전투를 마치고 났을 때, 무릉계곡을 흐르는 냇물은 온통 핏빛이었다고 한다. 붉은 핏물이 흐르다 고이던 하류 삼화리 지역의 한 소(沼)는 이름이 아예 ‘피소’가 되었다. 또 수많은 화살들이 물에 흘러내려 하천 이름도 화살 전(箭)에 내천(川)자를 써서 ‘전천’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두타산성은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 겪었다. 한말의 의병활동이나 6.25 한국전쟁 등 상황이 만들어질 때마다 계속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이 되었고, 그때마다 산성의 파괴가 누적되었다.


0005(활한 바위 면에 다양한 서체와 크기로 글자를 새긴 무릉반석.)
▲ 활한 바위 면에 다양한 서체와 크기로 글자를 새긴 무릉반석.


두타산성에 얽힌 수수께기들

두타산성의 축성 시기를 언급한 문헌들의 검토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축성 시기를 신라 파사왕대로 언급하고 있는 문헌들이 있다. 1847년에 간행된 〈두타산 삼화사 사적〉과 1963년 간행된 〈진주지(진주는 강원도 삼척의 옛 이름)〉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한나라 영원 14년, 신라 파사왕 23년 임인에 험한 곳에 산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보다 시기를 좀 늦추어 고려 말기를 지목한 기록도 있다. 〈태조강헌대왕실록〉이 대표적인데, “이전 원나라 야굴대왕이 군사를 이끌고 이 지방에 침입했을 때 목조(태조의 4대조인 이안사)가 두타산성을 지키면서 난리를 피하였다”는 기록을 싣고 있다. 이미 두타산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문맥이다. 세 번째 기록은 〈문화유적총람〉이나 〈여지도서〉 등에 보이는 것으로, 여기에는 태종14년인 1414년을 두타산성의 구체적인 축성시기로 언급하고 있다.

“태종 13년 삼척부사 김맹손이 쌓았다”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이상의 산발적인 기록들을 그 자체로 모두 신빙할 수 없으므로, 1997년 관동대학교 박물관팀의 지표조사 보고서의 내용과 견주어 보기로 한다. 그렇게 하면 두 번째 기록에 신뢰가 간다. 왜냐면 그 지표조사 보고서에서 성내에서 수습된 유물 중 신라시대 것은 없었고, 고려시대 유물들이 다수 수습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두타산성의 축성은 최소 고려 중기로 소급될 수 있고, 그렇다면 태종 시기를 언급한 제3의 기록은 아마도 좀 더 확실한 규모와 체제로 산성을 보강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0006(성벽의 파괴 정도가 조금 양호한 구간이다.)
▲ 성벽의 파괴 정도가 조금 양호한 구간이다.


한편, 축성시기를 정리해도 남는 숙제가 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난감하다. “두타산성을 동석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삼화사 서쪽 십리쯤에 있다. (흔들바위는-필자 주) 용추폭포 삼탕의 위쪽 가장 깊은 곳에 있으니, 옛 성(두타산성)을 지나 매우 험한 고개 너머다(진주지)”, “태종 13년에 험한 곳에 흙으로 쌓았다(증보문헌비고)” 전자의 〈진주지〉 기록은 필자가 보충 개역된 것이다, 두 기록의 내용은 서로 충돌한다. 두타산성과 동석산성과의 정확한 관계, 석성과 토성의 구분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맥락이 통하도록 추가의 주석이 필요하다. 두타산성은 용추폭포와 1.5km 넘게 떨어져 있으니, 최단거리로 재더라도 가깝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역민들의 구전에 옛날 용추폭포 뒤 문간재에는 흙으로 쌓은 성문과 흡사한 시설이 있었다가 나중에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도 두타산성 주변에서 두타산 못지않게 유명했던 ‘흔들바위’로 두타산성의 이름을 섞어 불렀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 말해서 두타산성과 동석산성이 모두 두타산성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였으되, 두타산성과 동급이거나 능가하는 규모의 토성이 용추폭포 근처에 존재했다는 설명은 아닌 것으로 본다. 물론 토축이 두타산성의 축성법이 아님도 분명하다. 오늘날 남은 두타산성의 모습만으로도, 지금 사라져 없어진 용추폭포 너머의 토축 문루나 망루 정도에 의해서 압도될 규모가 아니다. 다소의 무리를 무릅쓰고 오직 타당성을 전제로 추리해 보자면, 석축한 본래의 두타산성과(두타산성을 토축한 것으로 기록한 것은 무조건 오류다) 문간재에 토축한 두타산성의 부속시설이 모두 함께 동석산성으로도 불리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진주지〉의 원 문장에서 “흔들바위는”이라는 표현 부분이 탈락해서 생긴 문맥의 혼란이 아닐까? 동석산성의 “동석”을 풀어보면 이는 “흔들바위”다. 그런데 그 흔들바위는 용추폭포 주변에 실제로 있었다가 영조 시대에 지진으로 무너졌다는 설과, 일제강점기 산판 작업으로 재목더미에 굴려져 없어졌다는 소문이 함께 전해진다.

0007(두타산성의 북단면이 되는 계곡. 성 안쪽 3-4개의 골짜기가 합류하여 절벽과 폭포를 이루며 무릉계곡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의 적 침투는 불가능하다.)
▲ 두타산성의 북단면이 되는 계곡. 성 안쪽 3-4개의 골짜기가 합류하여 절벽과 폭포를 이루며 무릉계곡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의 적 침투는 불가능하다.


백두대간 줄기 이루는 두타산

두타산성이 소재하고 있는 동해시는 강원도 영동지역 중 강릉시와 삼척시의 중간에서 서쪽으로 백두대간을 경계로 정선군과 이웃하고 있다. 백두대간으로 두타산(1352.7m), 청옥산(1403.7m), 망군대(1247m), 고적대(1353.9m), 괘병산(1132.6m), 이기령(1128.7m), 상월산(1127.2m), 백복령(1119.2m)등이 이어진다. 두타산은 두타산성이 위치한 배경이다. 일찍부터 실제로 더 높은 청옥산 등을 누르고 지역의 진산으로 간주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미로면의 경계를 이룬다. 좌로 청옥산을 향해 나가며, 다시 망군대 고적대 등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지면서 동해 쪽에서 서쪽으로 깊게 파고드는 옆구리를 만들어서 그 안으로 무릉계곡을 품는다.


0008(타산성 남쪽 끝부분이 되는 부분의 이정표. 산성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성돌을 가지고 무심히 돌탑을 쌓아간다. 있다.)
▲ 타산성 남쪽 끝부분이 되는 부분의 이정표. 산성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성돌을 가지고 무심히 돌탑을 쌓아간다.


두타산은 일찍부터 삼척의 모산으로 중시되었다. 주변에 있는 더 높은 청옥산이나 고적대 등을 물리치고 그렇게 중심으로 인정된 것은 나름으로 특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신이한 인물들이 찾아와 노닐었고, 도력 높은 수도자들이 찾아와 기도했다고 한다. 예컨대 삼화사는 옛 신인들이 노닐며 이적을 행하던 삼공암의 변신이고,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삼공암을 원찰로 삼아 통일신라에서 후삼국으로 분열한 세상을 고려 하나로 화합하려는 서원을 실현한다. 삼화(三和)란 삼국을 재통일 하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물론 불교 교리에 있는 삼화란, 근(根), 경(境), 식(識) 삼자의 화합으로 사람은 이를 통해 구체적인 의식이 형성된다고 한다. 두타산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는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써서 우리민족의 정통성을 일깨운 이승휴(李承休ㆍ1224~1300)다. 이승휴는 이곳 출신이 아니나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에 와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학문을 닦았다. 뿐만 아니라, 〈제왕운기〉라는 민족의 대서사시를 이 지역에 머물 때 지어서 민족적 자부심과 주체성을 일깨웠다. 한민족은 모두 단군 한 조상의 자손임을 역설하였고, 한반도와 요동을 포함하는 거대한 영토관을 일깨웠다.

두타산은 무릉계곡을 향해서 북쪽으로 발치를 내린다. 그 발치 끝이 무릉계곡이고, 그 복부와 흉곽이 두타산성에 해당한다. 두타산성으로 오르는 경로는 국민관광지 1호로 지정된 무릉계곡 입구에서 시작된다. 무릉계곡을 끼고 두타산 발치와 짝을 이루는 산은 지조산이다. 이 지조산은 고적대에서 갈려나온 산으로, 무릉계곡 건너 두타산 발치 및 허리와 짝을 이루어 온통 암괴로 벽을 세웠다. 두타산성 북단에서 계곡 너머로 건너다보면, 관음암은 마치 신선이 사는 집처럼 초월한 분위기로 보인다.

0009(구름에 휩싸인 두타산성의 남쪽 끝부분. 그 봉우리가 다시 두타산 정상부를 향할 때는 한 번 크게 낮아졌다가 올라가기 때문에 성의 방어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 구름에 휩싸인 두타산성의 남쪽 끝부분. 그 봉우리가 다시 두타산 정상부를 향할 때는 한 번 크게 낮아졌다가 올라가기 때문에 성의 방어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계곡 입구 관리사무소를 출발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곧 무릉계곡이 시작된다. 약간 붉은 색이 도는 바위 사이로 시원한 물살이 소리를 지르며 흐른다. 금방 너른 반석이 나타난다. 세상에 반석이라 부르는 너른 바위들이 널려있지만, 여기 이 반석 또한 크기로나 격으로나 다른 곳에 양보할 기세가 아니다. 어림해도 축구장 두세 개는 들어설만한 면적이다. 반석 위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글씨들이 각양의 서체와 필체로 아로새겨져 있다. 슬쩍 보아도 낯익은 필체와 이름들이 보이는데, 조선의 명필 양사언(楊士彦)의 글씨로 전하는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통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 먼저 시선을 끈다. 여기 보이는 주어격의 “무릉, 중대, 두타”는 모두 주변의 뛰어난 지명들이다. 그리고 서술어격인 “선원, 천석, 동천”은 신선들이 살만한 좋은 경치를 뜻한다. 결국 주변 자연을 유토피아로 찬양하는 내용이 된다. 초서의 필체는 날렵하다 못해 경쾌하고, 하늘로 사방으로 꿈틀꿈틀하는 것 같다.

반석 옆으로 금란정(金蘭亭)이 단정하게 서 있다. 금란을 정자의 이름으로 삼은 데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흔히 “두 사람이 한마음이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르고,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고 하지 않던가. 동해시가 되기 전 이 삼척지역에 살던 유생들이 구국의 결사로 금란계를 만들고, 그 유대를 지키려는 다짐으로 이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금란정 이웃에는 삼화사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을 지나면 다리 건너로 바로 삼화사 경내가 전개된다. 삼화사는 1천5백여 년간 이름과 위치를 바꾸어가며, 또한 몇 번의 파괴를 겪으면서 지금 이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0010(쌍폭포와 용추폭포에서 내린 물이 함께 어울리는 장면)
▲ 쌍폭포와 용추폭포에서 내린 물이 함께 어울리는 장면.


삼화사를 통과해 지나가면, 관음암으로 오르는 오르막길과 계곡을 계속 타고 오르는 갈래 길이 나타난다. 계곡을 고수하여 앞으로 계속 오르면 관음폭포를 올려다 볼 수 있는 전망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거기를 그냥 지나쳐 조금 더 오르면 두타산성으로 오르는 가파른 갈래 길과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 이정표의 안내대로 90도 방향을 틀어 가파른 산자락으로 붙으면, 약 500m 위에서 두타산성 북쪽 출입처를 만나게 된다. 이정표에서 계속 계곡을 타고 오르면 용추폭포나 쌍폭포, 문간재 또는 청옥산 등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0003(무릉계곡에 있는 고찰 삼화사.)
▲ 무릉계곡에 있는 고찰 삼화사.


두타산성 둘러보기는 통상 북쪽 출입처에서 시작된다.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암봉 위에 성벽이 변형된 형태나마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 남아있다. 계속 답사를 해도 여기를 능가하는 곳은 나타나지 않는다. 북쪽 출입지를 통과해서 잠시 길을 따라가다가 바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등산로만 챙기다 보면 크게 변화를 보이는 지형 때문에 성벽의 연결을 놓치기가 쉽다. 등산로가 오른쪽으로 진행하더라도 왼쪽을 유의하며 성벽으로 붙어야 한다. 온전한 성벽은 초반에 만난 것으로 끝이다. 이제부터는 벽이 아니라 잔해요 흔적일 뿐이다. 윤곽을 따라 도는 것이 쉽지가 않다. 우선 흔적을 놓치기가 예사요, 무성한 수풀에 진행이 막히기도 일쑤다. 유적인데도 무너진 잔해를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곳도 많다. 답사로를 정비하는 일이 성벽 정비에 앞서서 우선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벽의 흔적을 쫓는 답사는 이정표조차 없는 786.7m 봉우리를 통과해서 이정표 1-3-3으로 이어진다. 이 1-3-3지점은 아까 지나온 남쪽 입구(이정표 1-1에 해당)에서 거북바위 옆을 수평으로 통과해서 닿는 건물지 주변인 이정표 1-3지점과 내성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나중에 이 내성의 흔적을 따라서 답사를 추가할 수도 있다. 산성의 정상인 남쪽 끝부분, 곧 이정표 1-6까지 거의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왼쪽으로 바닥이 보이지 깊은 골짜기가 계속 이어지는데, 두타산성 답사는 경사의 정점을 잇는 성벽 흔적을 따라 계속 위로 올라가는 형식이다. 굵은 황장송이 자주 보이고, 그 사이로 안개가 짙어졌다 엷어지기를 반복한다. 순간 내가 지금 신선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이정표 1-6 지점은 산성의 남쪽 정점이다. 높이가 이미 1000m를 넘어 1032m다. 틀림없이 장대가 위치할 지점인데 무심한 돌무더기와 이정표만 달랑 서있다.

두타산 산행은 여기서 잠시 밑으로 떨어지는 길을 타넘고 계속 남쪽으로 이어가야 한다. 정상은 거기로부터도 1시간 반 이상 더 걸어야 한다. 살펴보면 여기서 이 산성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이 산성은 말안장 모양의 마안형이 아니라 모자 모양의 사모봉형이고, 전술상 뒤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함이 파악된다. 성벽은 1-6 지점을 정점으로 거의 직각에 가까운 큰 각도로 오른쪽 방향으로 꺾인다. 멀리 용추폭포 방향을 향해서 내리닫는 기세다. 그러면서 등산로는 이정표 1-4를 향해 이어진다. 그리고는 이정표1-3으로 꺾이어 내성의 중심인 건물지로 복귀한다. 그러나 성곽 흔적은 1-4에서 무릉계곡 낮은 쪽을 향해서 한참 더 뻗어간다.


▶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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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타산성 안내도.



교통

철도를 이용한 접근은 서울 청량리, 부산, 동대구, 영주, 대전 등에서 동해역으로 가는 기차편을 이용한다. 동해역에서 출발하거나 동해역으로 도착하는 운행편이 각각 하루 7회, 3회, 2회, 1회, 5회씩 왕복하도록 편성되어 있다. 정확한 열차정보를 알고자 하면 033-521-7788 동해역으로 문의하면 된다. 버스편은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평일 22회, 주말 28회까지 증편되어 운행한다. 소요시간은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동해행은 평일 하루 8회, 주말 11회씩 운행한다. 고속버스 정보는 033-531-3400 고속버스터미널로 알아보면 된다. 동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양한 지방으로 연결되는 차편이 많은데, 이 정보는 033-533-2020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한 접근은 내비게이션에 무릉계곡을 입력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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