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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 자료☆★★/★☆ 등산 여행☆

거울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가평 칼봉산 경반계곡청수·청기·청심의 '3청의 고장'에 들어서다

거울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가평 칼봉산 경반계곡청수·청기·청심의 '3청의 고장'에 들어서다


  

사진 전종현_산 이야기 연구소 소장

0001(크고 작은 계곡물을 족히 일곱 번은 건너야 폐교가 된 경반분교가 나온다. 이 말은 발을 적시지 않으려면 신발과 양말을 일곱 번 벗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 크고 작은 계곡물을 족히 일곱 번은 건너야 폐교가 된 경반분교가 나온다. 이 말은 발을 적시지 않으려면 신발과 양말을 일곱 번 벗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여름이면 자연스럽게 계곡을 찾는 이유는 ‘불’과 ‘물’, 즉 음과 양의 조화를 위해서다. 불볕 더위를 피할 겸 가평 칼봉산 경반계곡으로 트레킹에 나섰다. 예부터 산행객들 사이에선 가평을 ‘경기도 속 강원도’라 불렀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기 때문. 오늘의 목적지는 가평 심산유곡 속 경반계곡의 맑은 계류와 폭포는 물론, 칼봉 너머 회목고개 아래 국수당 당목까지다. 경반계곡 입구에서 버스를 내리자마자 엄청난 물 폭탄이 계곡을 따라 내려온다. 계류는 경반계곡을 따라 5km를 내려오다가 가평천과 합류하여 청평 부근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들머리 마을의 이름 또한 경반리로, 지명이 먼저인지 계곡이름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청수·청기·청심의 ‘3청의 고장’에 들다
‘맑은 물이 너른 반석 위로 거울처럼 비추며 흐른다’는 의미의 경반계곡 초입에는 가평군이 운영하는 칼봉산 자연휴양림이 멋진 풍치를 자랑하며 피서객과 캠핑객을 유혹한다. 좋은 공기와 짙푸른 녹음 속의 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도심에 찌든 흐린 머릿속이 개운해질 듯, 하늘도 푸르고 옥빛 물색도 맑은 청량감을 뿜어낸다. 흔히 가평을 일러 물이 맑아 청수(淸水), 공기가 좋아 청기(淸氣) 더불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맑아져 청심(淸心), 즉 ‘3청의 고장’이라고들 한다. ‘청심’이야 미처 경험해보질 않아 잘 모르지만 가평 군내 몇 번의 산행과 계곡탐승을 통해 ‘청수’와 ‘청기’는 익히 아는 바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거울처럼 맑은 계곡물에 얼굴을 비쳐가며 몸치장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면서 동네이름은 경반리가 되었고, 동네를 에워싸고 있는 봉우리 역시 맑고 투명한 이름인 수정봉(439.3m)이다. 경반계곡과 수정봉, 궁합에 딱 알맞은 이름이 이곳 산수에 붙여졌다. 경반계곡 입구에서 백학동 한석봉마을까지 대부분의 가옥들이 펜션 등 숙박업소를 운영 중이다. 신선들이 산다는 청학동은 많이 들어봤지만, 백학동이란 이름은 처음이다. 신선이 좋아하는 색깔이 옥빛이라서 청학이나 청운을 타고 오간다는데, 언제 청학이 백학으로 바뀌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하지만 청학이고 백학이니 색과 빛의 조화가 아름답긴 하다.

‘한석봉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선조 임금이 ‘조선의 보물’이라며 총애했던 한석봉을 초대 가평군수로 임명(1599년, 선조 32년)하고 또 부임한 것을 기억하고자 함인 듯하다. 개경 땅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석봉 한호는 “어머니는 떡을 썰 테니 넌 글을 쓰거라”란 일화로 우리에게 유명하다. 석봉은 어머니의 지극정성으로 공부에 매진한 끝에 진사시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갔지만, 유학자 출신의 조정 벼슬아치들은 그를 “두주불사의 괴팍한 품성을 지니고 글씨만 잘 쓰는 기능인”으로 치부하며 별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자신 역시 명필이란 소릴 듣던 선조 임금이 나서서 보호막이 돼주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으레 천재들이 그러했듯, 한석봉 또한 62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주위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0003(수락폭포를 보기 위해 경반분교에서 다시 계곡을 따라 오르니 ‘배씨 농가’가 나타났다.)
▲ 수락폭포를 보기 위해 경반분교에서 다시 계곡을 따라 오르니 ‘배씨 농가’가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걸으며 계류를 건너고 또 건넌다. 천연의 계곡에 왜 인공적으로 찻길을 조성해놨는지 모를 일이다. 일순의 편리함을 맛보고자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자꾸 훼손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앞선다. 지자체들은 당대에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보여주기식 개발을 할 것이 아니라, 백년 또는 천년 앞을 내다보고 후손들에게 자연 그대로를 물려줘야 할 것이다. 크고 작은 계곡물을 족히 일곱 번은 건너야 폐교가 된 경반분교가 나온다. 이 말은 발을 적시지 않으려면 신발과 양말을 일곱 번 벗어야 한다는 얘기. 4~5번은 벗었지만 이후부턴 만사가 귀찮아 신발을 신은 채 그냥 건넜다. 산을 오르려면 등산화와 양말이 젖지 않는 게 중요하단 생각에 처음엔 열심히 벗었지만, 나중엔 그 순간의 편안함이 최고였다.

0002(경반계곡을 오르는 길가에 떨어진 밤송이가 눈에 밟힌다. 구르는 밤송이에서 ‘이젠 찌는 듯한 더위도 얼마 안 남았다’는 계절의 암시를 본다.)
▲ 경반계곡을 오르는 길가에 떨어진 밤송이가 눈에 밟힌다. 구르는 밤송이에서 ‘이젠 찌는 듯한 더위도 얼마 안 남았다’는 계절의 암시를 본다.


경반계곡을 오르는 길가에 떨어진 밤송이가 눈에 밟힌다. 떨어져 스스로 벌어진 밤톨이면 먹어보기라도 하련만, 밤송이 자체가 설익은 듯 보이니 선뜻 발을 대고 스틱으로 찔러 볼 맘조차 없다. 구르는 밤송이에서 ‘이젠 찌는 듯한 더위도 얼마 안 남았다’는 계절의 암시를 보게 된다. 맞다, 요란스럽게 울어대던 매미가 언제부턴지 자취를 감췄다. 매미가 울면 가을이 임박했다는 신호라고 하더니만, 계절이란 놈도 역시 세월 앞엔 장사는 아니었다. 추석이 지나면 곧 귀뚜라미가 울겠고 그러면 겨울도 동구 밖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릴 일이다. 뒤돌아보면 별 큰 낙도 없이 인생을 살았는데, 아내는 나만 보면 ‘너만 인생을 즐겼다’는 표정을 짓는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각 나이세대별로 없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단다. “답은 한 글자로만 말하고 돈, 꿈, 빽, 줄, 힘은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자 20대에선 ‘답’이라는 응답이 많이 나왔다. 10대엔 답만 잘 쓰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으나 20대엔 ‘답’이 없더란 얘기다. 30대에선 ‘집’, 40대는 ‘나(자신)’, 50대는 ‘일’, 60대는 ‘낙(재미)’이란 대답이 제일 많았다고 하니, 세대를 가를 것 없이 살 맛 없는 세상이다. 장자는 <인간세(人間世)>에서 ‘인개지유용지용 이막지무용지용(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 사람들은 유용만 알뿐 무용은 쓸 줄 모른다)’이라고 했다. 사소한 일에도 악착같이 낙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귀다툼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겐 중요할 듯하다.


0004(칼봉산 자연휴양림. 자연을 위해서라면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백패킹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일이다.)
▲ 칼봉산 자연휴양림. 자연을 위해서라면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백패킹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일이다.


칼봉의 ‘칼 맛’을 제대로 본 산행

곱게 다듬어 놓았던 찻길이 점차 거칠어지는 걸 보니 이젠 경반계곡 상류로 가는 모양이다. 계곡은 폭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면서 자갈밭과 암반 투성이의 길로 변한다. 칼봉(900m)과 매봉(930m) 사이 수락폭포에서 시작되는 경반계곡은 예부터 유명했던 칼봉 북편 용추계곡에 비해 별로 뒤떨어지지 않는다. 용추계곡을 다녀와 좋은 느낌을 받았기에 가평의 경반계곡을 다시 찾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경반계곡은 자연미가 좋고 용추계곡은 웅장한 계곡미가 있는 듯하다.

밤송이를 본 후 가을이 문턱까지 왔구나 생각했지만, 이름 모를 나뭇가지 끝엔 이미 소리 소문도 없이 벌써 가을이 매달렸다. 봄에서 여름 그리고 또 가을, 숨 쉴 틈 없이 세월은 우릴 몰아붙인다. 가끔 다시 20대 군대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혹 그 꿈이 실현된다 해도 인생의 여정은 별반 달라질 게 없을 듯하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늙음을 한탄하며 읊은 <백발>이란 시에서 “흰머리가 다시 검은 머리가 된다 해도 마음이 이미 메말라 버렸으니, 다시 인생의 꽃을 피우긴 어렵다”고 했다. 흑발의 머리보단 마음의 메마름을 다시 살리는 게 중요하단 이야기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만은 평생 청춘으로 살아야 진정한 젊음이다. 남들은 “철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대충 일곱 번 정도 개울을 건넜다고 생각할 무렵, 폐교가 되어 캠핑장이 된 경반분교(031-581-8010)가 나타난다. 자연 속 쾌적한 산골학교였던 경반분교엔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린 사라진 지 오래고, 대신 4륜구동 자동차의 시동소리와 코펠과 버너를 정리하는 달그락 소리만 요란하다. 어제 비가 내려서인지 텐트로 가득해야 할 캠핑장이 좀 썰렁하다. 이곳까지의 찻길은 아마 오프로드(off-road)를 즐기는 4륜구동 차량들이 캠핑장을 자주 이용해서 생긴 모양이다. 차량은 칼봉산 휴양림 주차장에 세워놓고 30분 정도 백패킹으로 이곳까지 오는 것도 자연을 위해 괜찮을 일이다. 텐트를 접는 분께 물으니 캠핑장 이용요금은 차량 1대당 하루 3만원, 백패킹으로 오는 캠핑족들은 1인당 1만원씩을 받는다고 한다. 주방과 샤워장 그리고 화장실 등을 사용하고 또 분교 앞 계곡과 주변이 온통 오지 속 자연이니, 이 정도 피서를 즐기자면 적정하단 생각이다. 캠핑장 주인은 “1970년대만 해도 경반리 산골엔 화전민이 100여 가구나 있었고, 당시 경반분교에도 약 80여 명의 학생들이 다녔는데 1982년 폐교할 당시 학생 수는 3명뿐이었다”고 전한다. 30여 년 전 이곳을 인수했다는 그는 “이곳 생활이 너무 행복하다”고 즐거운 비명이다.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TV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미국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가 나와 새해엔 선발로테이션에 뽑히길 기원하며 한겨울 얼음 속 계곡물에 입수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경반분교 앞 계곡이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얼음을 깨고 그들이 입수하는 순간, 나 또한 저절로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있다. 강원도 어느 두메산골 계곡인 줄로만 알았는데 바로 이곳이었다니, 세상이 좁은 건지 아니면 우리 땅이 좁은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칼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경반사 절 안을 통과해 회목고개로 오르는 길과 경반분교를 끼고 우측으로 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40도 이상의 급경사를 1시간 이상 오르는 칼날 같은 코스가 있다. 무지막지한 코스를 아는 이유는 우리 일행이 바로 그 코스로 올랐기 때문이다. 칼봉 산행을 결론부터 말하면, 시종일관 그렇게 힘들고 진땀나는 산행은 처음 경험해 봤다. 세상만사 고생 끝엔 작은 낙이라도 맛보는 게 인생사인데, 이건 죽도록 고생만 하고 도로 급하게 내려오는 산행이었으니 입에서 욕만 중얼거리다가 끝났다. 때문에 칼봉에 대해선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건강엔 많은 도움이 됐겠지”하고 위로를 했으나, 다음날부터 몸에 이상이 생겨 생고생만 했다. 무리한 산행은 건강에 도움은 고사하고 성한 몸도 상하게 할 뿐이니, 신체와 나이에 맞는 적당한 산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경반분교 우측으로 들어서서 작은 계곡을 끼고 오르자 처음엔 마치 정글 속으로 들어가는 양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론 흥미로운 정글탐험보단 시종일관 가파른 경사에다 울창한 숲까지 시야를 가로막아 주변 상황을 전혀 가늠할 수 없으니, 더운 날씨와 함께 답답함과 짜증만 배가된다. 하긴 칼봉 이름 속 ‘칼’ 자가 괜히 들어있는 게 아니라고 서로를 위안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칼맛 한번 제대로 본 산행이다.

칼봉으로 오르는 길에 나타난 작은 계곡 속 소폭(小瀑)은 무척이나 운치 있는 풍치를 지녔다. 비록 폭포의 규모는 작았지만, 잘 생겼고 심지어 도도한 품격마저 드러낸다. 사람으로 치면 선풍도골(仙風道骨)이요, 옥골선풍(玉骨仙風)이라고나 할까? 폭포가 맘에 드니 저 폭포를 배낭에 넣어 거실 앞 베란다 한켠에 놓고, 매년 여름만 되면 저 폭포 안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0005(경반사 소원성취의 종. 종소리는 생각만큼 신통치 못해 기원한 바가 제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 경반사 소원성취의 종. 종소리는 생각만큼 신통치 못해 기원한 바가 제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회목고개의 국수 당나무를 생각하며

능선에 도달하자 바위들이 나타나면서 전형적인 흙산에서 암릉의 모습 또한 보여준다. 우람한 바위가 칼봉을 지키는 문바위 역할과 수문장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는 모양새다. 여기서 고생 끝 행복시작인 줄 알았으나, 봉우리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란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몇몇은 내려가다가 길을 잃고 경반분교로 아주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물론 칼봉 정상의 조망이 별로인 걸 알고 갔으니 정상에 오르지 못한 서운함은 없었다. 하지만 하산 길에 회목고개 근처 국수 당목을 보질 못한 건 너무나 안타까웠다.

서낭당 이름인 국수당(國樹堂)은 ‘나라 나무’라는 뜻인데, 마일리에 ‘국수당마을’까지 있으니 전패(殿牌)라는 이름이 붙은 옛 고개와 마을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다. 전패고개는 주변 선비들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라님의 패를 모셔놓은 전각에 예를 드리고 오갔다는 고개다. ‘회목고개’란 이름 또한 그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으나, 당목인 나무이름에서 따왔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선비들의 나무라는 회화나무(懷木)에서 유래했는지, 회목(檜木)이라고도 불리는 전나무나 ‘제후의 나무’라고 불리는 측백나무인지는 알 수가 없다. 평소 알고 지내던 나무박사님께 자문을 구하니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가리키는 한자 ‘괴(槐)’를 중국에서는 ‘회’라 발음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회화나무’ 또는 ‘회나무’라 불렸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시골에선 ‘괴목’ 혹은 ‘회목’으로 혼용해서 불렀는데, 이는 글을 아는 선비는 나무를 잘 몰랐고 나무를 아는 촌부들은 글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보진 못했으나 회목고개의 회목은 당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느티나무일 것”이란 도움말을 주신다.

칼봉을 넘어 회목고개를 거쳐 온 일행의 사진 속 안내판엔 나무이름이 ‘국선왕(國仙王)’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이 이름은 서낭당 당목이 마을의 수호목을 넘어 국태민안을 바라는 호국목이란 의미까지 덧붙여진 듯하다. 혹 서낭당 당목 곁에 ‘나라님의 패를 모신 전각’이란 이름의 당집은 없었을까? 또 누군가 국수당 당목에 관해 들려주길 “수백 년 된 물푸레나무와 고로쇠나무가 서로 맞붙어 있는데, 매년 추석 때면 마을사람들이 추렴해 햇곡식과 햇과일 그리고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제를 드렸다”고 한다. 회목고개의 국수 당나무가 느티나무인지 아니면 물푸레나무와 고로쇠나무인진 훗날 직접 보고 판단을 해야겠다.

오를 때와 같은 비탈진 산길을 힘들게 내려오니 다시 경반분교가 나온다. 막상 칼봉 정상을 밟지 못했다는 기분에 조금 아쉬움도 느낀다. 수락폭포를 보기 위해 경반분교에서 다시 계곡을 따라 오르니 ‘배씨 농가’가 나타난다. 한 집에선 구멍가게처럼 물이며 캔맥주도 팔고, 그 옆집에선 한약재와 함께 고추도 파는지 한여름 뙤약볕에 멍석을 깔고 고추를 말리고 있다. 이 집은 여름 성수기에만 들어와 장사를 하는지 아니면 평소에도 삶을 이어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하는 얘기론 3가구가 산다고 했으니 아마 이곳에 있는 집들을 말하는 모양이다.


0006(경반폭포 아래의 물웅덩이인 용추 속에 온 몸을 담그니 정신까지 맑아지는 게 마치 수신(水神)인 용이 된 기분이다. )
▲ 경반폭포 아래의 물웅덩이인 용추 속에 온 몸을 담그니 정신까지 맑아지는 게 마치 수신(水神)인 용이 된 기분이다.


쉬고 싶은 이들은 누구나 와서 편히 쉬시게

경반분교에서 다시 경반사 방향으로 오르다가 좌측을 보니 송이봉(803m)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계류가 모여 ‘송이폭포’라는 이름의 소폭(小瀑)을 만들었다. 경반계곡이 수량이 풍부하고 깊은 못과 너른 바위가 지천으로 깔린 이유는 계곡 양편 여러 봉우리들에서 흘려보낸 물을 경반계곡이 담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뜨는 절’이라고 써 붙인 경반사(鏡盤寺) 우측에는 경반폭포가 있다. 절에선 경반폭포를 지장폭포라고 부른다. 캠핑족들 사이에서 경반사가 유명한 건 “누구든 쉬고 싶으면 들어와 편히 쉬고, 밥을 지어 먹고 싶으면 맘대로 부엌을 쓰라”는 안내판 때문일 듯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저 문구가 진정이라면, 경반사 주지야 말로 자비로 똘똘 뭉친 보살이나 부처가 분명하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맘이 바로 부처, 즉 심즉불 불즉심(心卽佛 佛卽心)의 발로를 여기서 본다.

경반폭포 아래의 담(潭)인지 소(沼)는 그야말로 거울처럼 맑았다. 경반폭포 아래의 물웅덩이인 용추 속에 온 몸을 담그니 정신까지 맑아지는 게 마치 수신(水神)인 용이 된 기분이다. 선녀가 한밤 중 깊은 산속 선녀탕에 내려와 목욕하는 기분이란 게 이런 것일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고 높은 산에 올라야 하늘이 높은 줄 안다고, 힘들이지 않고 좋은 걸 보거나 깨닫기란 요행을 바라는 마음과 매한가지다. 힘들었지만 이곳까지 오르니 이렇게 좋은 자연풀장도 만나고 마음까지 흐뭇해지는 흥겨운 정취를 맛보게 된다.

경반사를 지나 얼마를 걸어 오르니 차량통제용 차단기가 나타나고 곧 길이 끊기면서 산길은 계곡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계곡을 따라 오르니 폭포는 보이지 않는데 어디선가 벼락을 치는 듯한 물소리가 요란하다.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숲 속을 헤집고 들어서니 구비구비 구절양장처럼 계곡 또한 꿈틀댄다.

0007(자연 속 쾌적한 산골학교였던 경반분교엔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린 사라진 지 오래고, 대신 4륜구동 자동차의 시동소리와 코펠과 버너를 정리하는 달그락 소리만 요란하다.)
▲ 자연 속 쾌적한 산골학교였던 경반분교엔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린 사라진 지 오래고, 대신 4륜구동 자동차의 시동소리와 코펠과 버너를 정리하는 달그락 소리만 요란하다.


수락폭포(水落瀑布)는 칼봉과 매봉 사이를 흐르는 계류가 40m 높이의 암반으로 떨어지는 폭포로, 포천 비둘기낭폭포 및 무주채폭포, 운악산 무지치폭포, 감악산 운계폭포, 연천 재인폭포, 중원산 중원폭포 등과 함께 경기도 내 1,2위를 다툰다. 이 폭포의 거대한 물줄기는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바람에 휘날리는 듯 솜털처럼 주변으로 흩날린다. 폭포는 1단이 아니라 하단 폭포 위로 또 한 층의 폭포가 있었다. 시간이 남는다면 상단까지 올라가봤을 텐데 하산시간에 쫓겨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통 속 걷기 끝에 멋진 수락폭포를 본 것으로 오늘 산행은 대만족이다.

수락폭포에서 흩날리는 포말을 실컷 보고 물보라까지 뒤집어 쓴 채 다시 하산하면서 경반사 소원성취의 종을 만났다. 어머님의 무병장수를 위해, 자식의 분발기원을 위해 그리고 가족과 친지를 위해 세차게 몇 번을 흔들었다. 종소리가 시원하고 명쾌했으면 좋으련만, 별 신통한 소리를 내지 못하니 기원한 바가 제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경반계곡은 찻길이 생기면서 계곡미를 어느 정도 잃긴 했지만, 이름 그대로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계류가 흐르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8월이면 여름도 이젠 끝물이다. 여름이 다 가기 전 피서를 겸해 당일치기 계곡트레킹이나 1박 2일 캠핑을 원한다면 경기도 가평 경반계곡을 적극 추천한다.



사진 전종현_산 이야기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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