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지 못하고 돌아서다, 그 길 앞에서…하늘나라 선녀가 목욕했던 ‘칠선계곡길’ 9km
백무동에서 창암능선 넘어 두지터로 가는 길. 근래 두 지점을 오가는 등산로가 정식으로 개통됐다. 거리 약 2.7km로 추성리에서 오르는 것보다 거리도 길고 코스도 힘들지만 대신 숲의 아름다움을 흠뻑 맛볼 수 있는 코스다. |
칠선골 깊은 골에 숨어 우는 산녀 / 풀어지는 물소리로 마음 씻으라 / 폭포는 숲 사이로 눈썹만 내민다 누가 있어 알아들을 것인지 / 허리 굽은 신갈나무 쓰러져 있고 / 골을 물들이는 가을바람에 부끄러운 사랑도 물들일 일이다. 강영환의 시 ‘깊은 허기_칠선골’ 중 일부
지리산 칠선계곡은 설악산 천불동계곡, 제주도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자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포 등 7개의 폭포와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청춘홀 등 30여 개의 소와 담이 어우러진 명소다. 산행 초입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부터 남한 내륙 최고봉이자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1915m)까지의 거리는 약 9.7㎞.
1997년 강풍과 폭우로 훼손된 칠선은 이듬해인 1998년 생태계 회복과 탐방객 안전을 위해 10년간 출입통제 되었다가 2008년 5월 시범 개방되었고, 2010년부턴 ‘탐방예약가이드제’로 본격 개방되었다. 칠선계곡 탐방은 5월과 6월, 9월과 10월, 1년에 넉 달만 가능하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반드시 사전 예약해야 한다. 다만 비선담까지는 계절과 예약 여부에 상관없이 상시 개방하므로 누구나 가벼운 트레킹이 가능하다.
지리산꾼에게 칠선계곡이란?
백무동~두지터 등산로에 위치한 대숲. 손으로 짚으면 차가운 기운이 스며든다. |
칠선 산행은 대부분 기억 속에 갇혔다. 국립공원특별보호구(자연휴식년제)로 지정돼 산행이 금지됐으니 산행을 다녀왔다면 1998년 이전이 될 것이며, 그 이후에 갔다면 대놓고 말하기 힘든 불법 산행이 되는 셈이다. 특별보호구는 국립공원 내 서식하는 동식물 중 보호 가치가 높거나 인위적·자연적 훼손으로부터 보호할 필요성이 있는 야생동물서식지, 야생식물군락지, 습지, 계곡 등 주요 자원 분포지역을 출입통제하는 것으로, 칠선계곡의 경우 2027년 12월까지 비선담~천왕봉 구간 5.4km와 124,000㎡가 지정된 상태다.
백무동에서 두지터(두지동)로 가는 길은 창암능선 너머로 이어진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지리산공비토벌루트’가 있던 곳이다.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걷다 등산로 옆에 놓인 빨치산 인형을 보고 놀라자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총칼을 들고 선 사람 크기의 인형이었다. 지금의 창암능선은 몰래 칠선계곡 산행을 하려는 이들의 비밀 루트가 되었다. 창암능선에 올라선 길은 곧 칠선계곡에 가닿았다.
운이 나쁜 이들은 하필 그 시간 칠선에 일하러 나온 공단 직원에 걸려 과태료 폭탄을 맞고 하산을 강요당한다. 비까지 내려 우중충한 날씨였다. “어차피 내려갈 거 갖고 온 막걸리 한 잔만 해도 되겠습니까?” 산꾼은 슬쩍 동정심을 부추기지만 공단 직원은 한결같이 단호하다. 꼼수란 있을 수 없는 길, 칠선계곡은 지리산꾼에게는 꿈의 길이다. 그 길을 걸어 천왕봉까지 오르내리는 일, 통제 중이어서, 그렇지 않다 해도 험한 코스여서 남들이 쉽게 갈 수 없는 곳. 칠선은 지리산꾼의 무용담 단골 코스가 되었다.
휴식 중인 취재진. 이쯤에서 칠선계곡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
백무동에서 두지터까지
‘칠선계곡길’이란 이름이 따로 붙은 건 아니다. 백무동~두지터 코스가 둘레길 또는 옛길 개념인데다 비선담까지 가파른 구간도 많지 않아 가벼운 당일 트레킹 코스로 적당하다. 이름 붙은 길만 가기엔 이름이 붙지 않은 길들이 너무 아깝다. 2012년만 해도 ‘지리산 칠선계곡 추성옛길’이란 게 있었다. 벽송사, 국골 입구, 어름터, 광점동 등을 경유하는 3개 구간인데, 지금은 관리를 하지 않는지 안내판도 이정표도 보이질 않는다.
백무동(마천면 강청리) 다샘펜션 옆 이정표를 따라 등산로로 접어든다. 길은 곧고 반듯하지만 전체적으로 습한데다 인적이 드물어 야생의 거친 맛이 느껴진다. 땅속 깊이 묻힌 바위와 드러난 바위 위의 초록 이끼, 빼곡한 숲 사이로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울창한 대숲도 있다. 손으로 만지면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든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갈갈’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면 커튼처럼 댓잎이 드리웠다. 하늘로 향한 창을 댓잎 커튼이 막고 있었다.
잣나무 숲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어서 이 숲을 맞닥뜨리는 순간 “아!” 짧은 감탄이 저절로 쏟아진다. 어느 녀석이 이렇게 야무지게 먹었을까? 바닥엔 빈 잣송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뱀도 있다. 앞서 걷는 일행이 제일 먼저 발견하고 휘휘, 길옆으로 쫓는다. 다시 “아!”라는 감탄, 아니 비명이 들린다. 마지막에 걷는 사람은 정작 뱀은 못 보고 “아!” 소리에 더 놀라 “아아악!” 몇 배는 큰 비명을 낸다. 그 이후에야 “왜? 뭐야?” 이유를 묻는다. 이성부 시인의 시 ‘칠선골’ 말미에도 “추성리 다 내려온 돌담 아래에서 / 살모사 한 마리 본다”라는 시구가 있을 정도. 다음엔 스틱도 챙겨오고, 발목까지 오는 중등산화도 신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산중 깊은 마을 두지터. |
두지터와 칠선계곡
백무동을 출발한 지 1시간 30분만에 두지터에 닿는다. 추성리에서 곧장 올랐다면 3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다. 대신 추성리로 올랐다면 보지 못했을 숲의 절경과 공기가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고도 500m 안팎의 두지터는 지리산 북쪽이지만 동향이어서 아침해가 궁색한 마을은 아니다. 한때 자주 찾았던 K의 집엔 배롱나무 꽃이 레드카펫을 만들고 있었다. 주인이 오래도록 집을 비운 모양이다. 적막한 빈집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본격적인 칠선계곡 길로 접어든다.
두지교를 건너면 다시 깊은 수림이 펼쳐진다. 길은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숲 너머의 물소리가 칠선의 위용을 과시한다. 이미 산행을 마치고 돌아나선 팀이 칠선교 아래에서 탁족을 즐기고 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물소리에 뒤섞여 하류로 흘러왔다. 붉은 칠선교를 건너면 계곡은 잠시 능선 너머로 숨을 죽인다. 물소리는 잦아들고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숲길이다.
칠선계곡의 첫 번째 다리 칠선교. 이 다리를 건너면 길은 선녀탕에 닿기까지 숲길로 이어진다. |
뱀들은 어김없이 등산로 주변을 얼쩡대며 걷는 이들을 놀래킨다. 왕복 4시간 30분을 걷는 동안 눈에 보인 뱀은 4마리, 눈에 보이지 않는 뱀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어디 뱀뿐인가. 원시림으로까지 불리는 칠선과 좌우로 뻗은 능선, 지리산은 수많은 산짐승의 서식처다. 타국에서 온 반달가슴곰조차도 이제는 자리 잡았고, 공단 직원은 둘째 치고 반달곰 때문에라도 인적이 드문 길은 산행을 꺼리게 된다.
아니, 곰은 꼭 사람을 피해 살진 않는다. 지난해 6월, 음식물 쓰레기를 먹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벽소령대피소까지 나타난 어미 곰이 있었다. 일행과 담소 중이었던 등산객은 혼쭐이 났다. 120여kg의 반달곰은 추워서 덮고 있던 침낭을 갈기갈기 찢었다. 대피소 문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녀석은 공단직원의 공포탄과 최루가스를 맞고서야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반달곰 출현 소식은 몇몇 언론에 보도되었다. 피아골에도 반야봉 아래 묘향암에도 천왕봉 옆 중봉에도…. <TV 동물농장>에 나오는 귀여운 아기 곰을 생각해선 안 된다. 곰들은 지리산과 더불어 무럭무럭 자란다. 키를 키우고 살을 찌운다. 배가 고프면 대피소를 얼쩡대고, 등산객의 배낭을 집어 든다. 지리산 야간산행과 비박, 소위 샛길 산행은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선녀탕과 옥녀탕
다시 계곡 소리가 들린다.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선녀탕이다. 이곳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평소 선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곰이 목욕 중인 선녀의 옷을 훔쳐 숨겼는데, 하필 숨긴 곳이 사향노루의 뿔이었고, 옷을 돌려준 노루 덕분에 무사히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 그후 노루는 칠선계곡에서 잘 살았고, 꽤씸죄에 걸린 곰은 이웃 국골로 쫓겨났단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펴낸 김명수의 책 <지리산>에 따르면 전설과는 달리 곰이 가장 많이 서식했던 곳은 칠선이다. 밀렵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반엔 한해에 40마리까지 잡은 적도 있다. 인간이 잡아 멸종시키고, 다시 인간의 손에 의해 수입돼 지리산에 풀린 반달곰의 운명도 기구하다.
선녀탕보다 더 아름다운 건 바로 위쪽의 옥녀탕이다. 초록의 물 위로 드리운 노거수 그림자까지 더해져 경이로움이 한결 돋보인다. 선녀탕이 옥녀탕 아래 위치한 이유를 알겠다. 옥녀탕은 목욕을 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곳이다. 아무리 천상의 미모를 가진 선녀라 할지라도 옥녀탕 상류에서 목욕을 해 물을 더럽혀서도 안 된다.
길은 비선담을 지나 통제소 앞에서 막혀 있다. 이후로는 예약자에 한해, 가이드 인솔 하에 올라
옥녀탕은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소로 꼽힌다. |
갈 수 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산깨나 다닌다는 사람이 아니면 섣불리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다. 칠선계곡은 1970년대 에베레스트 원정 동계훈련을 하였던 곳이다. “지리산을 사랑해 지리산에 머물다 지리산에서 사라진 우천 허만수”가 홀연히 자취를 감춘 곳도 칠선이다.
더 이상 오르지 못할 곳을 등 뒤에 남겨두고 다시 비선담~옥녀탕~선녀탕~두지터를 지나 추성리로 내려선다. 조금 전에 올랐던 길인데도 거꾸로 내려서며, 보는 시선을 달리하면 순식간에 새로운 길로 변신한다. 발 앞에 툭툭 지리산의 가을이 치인다.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성을 쌓았다, 혹은 ‘추자나무’인 호두나무가 많아서 그러한 이름이 붙은 추성리로 내려선다. ‘상전벽해’란 말을 증명하듯 마을은 세월을 타고 많이도 변했다. 이 가을은 또 얼마나 빨리 떠날 것인가.
INFORMATION
함양 칠선계곡길 구간별 거리
백무동(다샘펜션 옆)-두지터(2.7km)-선녀탕(1.9km)-비선담(0.5km)-두지터(2.4km)-추성리(1.5km)
거리: 약 9km
시간: 휴식 포함 약 4시간 30분
옥녀탕 |
다샘펜션 옆 이정표를 따라 올라서면서 길이 시작된다. 인적이 드문데다 습한 곳도 많지만 비교적 정비가 잘 된 곳이다. 특히 대숲과 잣나무 숲으로 이어진 길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1시간 10분쯤 꾸준한 오르막, 그러나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은 오르막을 올라서면 ‘윗장구목’이 나오고, 이후로 두지터까지는 내리막이다. 두지터에서 잠시 휴식 후 이정표를 따라 두지교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칠선계곡 산행이 시작된다. 칠선계곡은 특별보호구로 묶인 곳이지만 비선담까지는 상시 산행이 가능하며 사전 예약할 경우 천왕봉까지 오르는 것도 가능하다. 칠선교를 건너 한동안 숲길을 따르던 길은 선녀탕에서부터 계곡 옆으로 이어지며 절경을 자아낸다. 비선담에선 다시 선녀탕~두지터로 거슬러 내려와 추성리로 하산한다. 백무동과 추성리, 두 곳 모두 두지터로 연결되지만 추성리쪽이 거리도 짧고 길도 편하다.
지리산롯지 |
오가는 길 (지역번호 055)
대중교통 / 서울 서초동남부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 백무동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남부터미널의 경우 저녁 7시 40분(19,900원)과 밤 11시 50분(21,900원), 동서울터미널은 아침 7시 첫차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8회, 요금은 21,500원(심야 23,600원)이다. 약 3시간 30분쯤 걸린다. 추성리로 하산한 경우에도 마천으로 이동하여 서울행 버스를 타면 된다. 함양이나 남원을 통해 상경하는 것도 가능하다. 수원을 비롯한 경기권, 부산, 대전 등에도 함양을 오가는 버스가 있다. 함양으로 왔다면 백무동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구간 시작점은 마천면 강청리에 위치한 ‘다샘펜션’이므로 펜션 앞 하차 여부를 미리 확인해두는 게 좋다. 구간 종점인 추성리에서 함양(마천)으로 나가는 버스는 오전 8시 40분, 오후 2시 20분, 4시 40분이다.
터미널 연락처 /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 02-521-8550, 동서울터미널 1688-5979, 시외버스 예매 사이트 www.busterminal.or.kr, 함양시외버스터미널(함양지리산고속) 963-3745, 마천 버스정류장 962-5017, 인월 시외버스터미널 063-636-2000, 마천(백무동) 택시 010-4422-5300
자가용 / 서울의 경우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에서 함양IC로 나와 마천~백무동 방향으로 이동한다. 함양에서 88고속도로로 진입 후 지리산(인월)IC로 나온 다음 백무동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부산쪽에선 생초IC, 전라권에선 지리산IC 또는 거주지에 따라 구례화엄사IC로 나와 국도를 탈 수도 있다. 다샘펜션 앞에 주차장이 있다. 비수기엔 별도의 주차요금을 받지 않는다. 추성리로 하산했을 경우 택시를 이용해 차량 회수를 해야 하는데 이 경우 요금은 14,000원이다.
기타 정보 (지역번호 055)
• 중간에 두지터를 지나지만 공식적인 화장실은 없다.
• 두지터에 매점이 있긴 한데 비수기엔 영업을 하지 않는 날이 많다. 간식과 식수는 미리 챙겨가는 것이 좋다.
• 취재진의 경우 뱀 4마리를 만났다. 변수는 있겠지만 만약을 대비해 스틱과 목이 긴 등산화를 착용하는 것이 좋겠다.
• 칠선계곡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진 산행은 예약을 해야만 갈 수 있다. 5월, 6월, 9월, 10월에만 가능하며 희망자는 인터넷(jiri.knps.or.kr)으로 사전예약 해야 한다.
•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970-1000
숙식정보(지역번호 055)
구간 시작점 백무동과 하산지점인 추성리엔 다샘펜션(964-2343)을 비롯 펜션과 민박 등 숙박시설이 밀집돼 있다. 폐교된 등구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한 ‘지리산롯지(963-9788)’는 4인실 기준 주중 5만원, 주말 6만원으로 직접 취사와 구내식당 이용이 둘 다 가능하다. 지리산둘레길 제3구간 창원마을에 있다. 구간 경유지인 두지터엔 매점을 겸하는 두지산장(010-6488-6027)이 있다.
황소영 객원기자 emountain@emountain.co.kr
'★★☆ 등산 자료☆★★ > ★☆ 등산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들의 고향, 한라산에 오르는 다섯 가지 길한라산(1950m) 산행 가이드 (0) | 2016.02.14 |
---|---|
꺾이지 말고 계속 가기를, 바람혹독하고 찬란한 소백산의 겨울 (0) | 2016.02.14 |
‘용호구곡’이 빚은 풍경 속으로용이 노닐다 승천한 구룡계곡 3.7km (0) | 2016.02.14 |
가깝고도 먼 길 바래봉 9.6km그대 눈앞의 겨울왕국, 눈 쌓인 그 산 (0) | 2016.02.14 |
설경이 반겨주는 눈꽃 세상으로 떠나자!이름난 심설 산행지 5선 (0) | 2016.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