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 바래봉 9.6km그대 눈앞의 겨울왕국, 눈 쌓인 그 산
철쭉으로 유명한 지리산 바래봉은 설경이 아름다운 봉우리이기도 하다. 정상 턱밑까지 임도가 연결돼 있어 산행 준비만 철저하다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
‘바래봉’은 산의 형상이 마치 삿갓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 지방 사람들은 ‘삿갓봉’으로 부른다. 혹은 스님의 공양그릇인 바리떼를 엎어놓은 모습과 같다 하여 ‘바리봉’이라고도 한다. 결국 바리봉이 변음이 되어 ‘바래봉’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정상 주변은 나무가 없고 넓은 초원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정상에 서면 천왕봉, 남원 시가지, 반야봉, 운봉읍의 평야와 마을, 덕유산이 지척이다.
백남오 수필집 ‘지리산 빗점골의 가을’ 중 일부
두어 달 전 다녀온 정령치~만복대 산행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지리산 서북릉은 노고단(1507m)에서 서북쪽으로 누운 성삼재~만복대~정령치~고리봉~바래봉 능선을 일컫는 이름이다. 그 길이만도 20km를 넘는데다 1000~1400고지의 봉우리들이 연이어 포진해 웬만한 준족들도 하루에 끝내기 힘든 곳 중 하나다. 서북릉 중간쯤 자리한 정령치(1172m)를 기준으로 남쪽의 만복대와 북쪽의 바래봉(1165m)은 모양도 성격도 같은 듯 달라서 보통 절반씩 끊어 산행한다.
바래봉까지 연결된 임도. 원점회귀 산행이라면 올라갈 땐 산길, 내려설 땐 임도, 방향을 달리하는 게 좋다. |
겨울산 앞에서
사실 바래봉을 걷기여행 코스에 넣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해발고도 1천 미터 남짓에다 만복대처럼 지척에 산중 주차장이 있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바래봉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지리산 북쪽 끝의 당당한 봉우리다. 눈이 쏟아지면 그 어느 산보다 무섭게 내리는 곳이기도 하다. 대신 이곳엔 너른 임도가 있다. 넓고 반듯한 길 덕분에 한겨울 폭설에도 (체력만 된다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도저히 못 오르겠다 싶음 되돌아 내려서면 된다.
지난달 구룡계곡을 함께 걸었던 두 여인은 아직 겨울산행이 익숙지 않다. 스패츠를 어떻게 차야 하는 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꼭 에베레스트 가는 것 같아요.” “에베레스트 가는 것처럼 준비해야 해요.” 아직 산 입구에 닿지도 않았는데 진입로 마을마다 수북하게 눈이 쌓였다. 찻길만 녹았을 뿐 도로 옆은 완전히 딴 세상이다. 오르지 않은 산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겨울산행에 경험이 많은 이도, 전혀 없는 이도 새하얀 설산 앞에서 가슴이 뛰는 건 똑같다. 스틱을 각자의 키 높이에 맞춰 조절하고, 등산화는 방수가 되는지, 여벌 양말과 장갑은 챙겨 왔는지, 일일이 확인을 하고 길을 나선다.
운지사 갈림길 앞에서 등산화를 털고 있는 산꾼들이 보인다. 이제 갓 오전 11시를 넘긴 시각, 벌써 다녀왔나? 아니면 이제 막 오르려는 참일까? 일찌감치 산행을 마치고 하산했단다. 산길 러셀 상태를 물으니 산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산길로 올라가 임도로 내려서는 게 좋겠다. 후, 심호흡을 하고 차가운 눈 위에 발자국을 찍는다. 자, 가자. 겨울왕국 속으로…
사시사철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바래봉 샘터. 예전엔 이 샘터 앞에 버려진 감시소 건물이 있었다. |
봄과 겨울, 바래봉의 계절
모두에게 똑같은 계절이지만 바래봉은 유독 봄에 바쁘다. 한때 양을 방목해 키웠고, 그 양들이 독성 강한 철쭉만 빼곤 모두 먹어치워 지금의 철쭉 명소가 되었단 말이 있다. 5월이면 바래봉 철쭉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냉해를 입거나 가물거나 혹은 때를 딱딱 맞추지 못해 허탕을 치더라도 5월이면 사람들은 주술에 걸린 아이들처럼 일렬로 줄을 맞춰 운봉으로 몰려든다. 봄이면 이 산은 색색의 등산복으로 화려하다.
경사는 산길이 더 가파르지만 몸이 느끼는 버거움은 임도와 산길, 둘 다 비슷하다. 어차피 원점회귀라면 각각 다른 길로 오르내리는 게 낫다. 길을 더 늘려 인월에서부터 덕두산을 거쳐 오를 수도 있고, 뱀사골 부근의 팔랑치와 부운마을, 샘터가 있는 세동치와 정령치 등에서도 산행이 가능하다. 힘든 화엄사 코스를 버리고, 모두가 성삼재에서 주능선 종주를 시작할 때 부러 바래봉이나 덕두산에서 시작하는 이들도 있다. 가능한 짧게, 덜 걷고 싶어 하는 이들과 기왕이면 멀리, 무겁게, 거리를 늘려 걷는 이들까지, 복작복작 봄의 풍경 뒤엔 바람과 추위와 고독이 뒤엉킨 서북릉의 또 다른 얼굴이 존재한다.
나뭇가지에서 쏟아지는 눈. 겨울산행의 재미 중 하나다. |
숲에 들어서면 다른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빼곡이 들어찬 나무는 새하얀 옷을 입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늘로 치솟은 가지는 그나마 남아있던 숨통까지 모두 막아버린다. 안개가 몰려왔다. 숲은 일순간 잠이 든 듯하다. 화려한 표지기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가끔씩 바람이 불 때마다 차가운 얼음덩어리가 뺨으로 떨어졌다. 산은 고요한 눈꽃 세상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에 솜이 왜 필요한지, 새하얀 가루를 왜 뿌리는지 알 것 같아요.”
철쭉 보러 왔을 땐 임도 입구에서 포기하고 돌아갔단다. 마치 <이솝우화> 속 여우처럼 “올해는 철쭉이 별로라더라.” 붉어진 봉우리를 애써 외면한 채 돌아선 회색배낭의 그녀는 그때보다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감탄을 쏟아냈다. 어쩜 여우가 못 먹고 돌아선 그 포도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포도였을 지도 모른다. 돌아서면 알 수 없다. 산은 더 그렇다. 제 발로 힘들게 걸어온 이들에게 틀림없이 보상을 한다. 그것이 풍경이든 친목이든 건강이든, 산은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 운지사를 출발한 지 1시간 30분쯤 지났을 때 숲길은 끝난다. 임도와 맞닿는다. 이 갈림길에서 바래봉은 1.6km, 올라온 길은 대략 3km쯤이다.
임도로 하산하는 길. 경사 급한 산길보단 무던한 임도가 하산 코스로 더 적당하다. |
바래봉 샘터까지
하늘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파란 하늘을 보기 힘든 날이었다. 조망은 없었지만 보이는 게 없다 하여 산행까지 맥 빠지는 건 아니다. 온세상이 눈으로 덮인 지금, 오히려 희뿌연 하늘은 운치를 더한다. 나무 난간에 수북이 눈이 쌓였다. 얼추 30cm는 됨직하다. 임도를 만드느라 깎아낸 경사면의 나무는 눈의 무게를 견디기 못하고 쓰러졌다. 나무 두어 그루가 길을 막고 있었다. 눈덩이를 뚫고 나온 초록의 잎이 아직 생생한 젊은 소나무다. 비탈진 곳에서 겨우겨우 버티고 산 모양인데 밤새 내린 눈에 이렇게 되었다.
영화 <겨울왕국>을 연상시키는 바래봉의 이국적 풍경(2014년 12월 촬영). 이번 산행에선 파란 하늘을 볼 수 없었다. |
팔랑치 갈림길에서 바래봉 샘터로 가는 길은 평지다. 힘들게 올라온 이들을 위로라도 하듯 이 길은 겨울왕국의 정점이 된다. 나무는 더 컸고, 더 하얗게 빛을 내었다. 이미 몇 번의 눈이 엉겨 붙은 잎들은 세차게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바래봉 인근의 전나무와 구상나무 숲은 철쭉보다 아름답다. 철쭉이 붉은 빛을 쏘아 올릴 때 이 일대의 숲은 초록으로 물이 오른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흙 위의 풀들은 또 어찌나 어여쁜지…. 가본 적은 없지만 막연히 북유럽 어디쯤과 닮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래봉 전나무 군락지. 그 위에 쌓인 눈은 철쭉 만개하고 신록 푸른 봄의 풍경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봄의 바래봉만 기억한다면, 이제 나머지 절반의 기억을 꿰어 맞춰야 한다.
“여기가 샘터예요.”
샘터를 지나치는 회색배낭에게 알려주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산장 없어요? 건물이 없어서 여기가 아닌 줄 알았어요.”
처음부터 바래봉에 건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산불 혹은 방목한 양들을 지킬 목적이었는지, 시멘트로 지어진 감시소 건물이 한 채 있긴 하였다. 출입문도 창문도 뜯겨 나가 사방으로 바람이 들어차 건물 밖과 별 차이가 없는 곳이었다. 건물이 철거된 자리만큼 바래봉은 넓어졌다. 풍경은 더 좋아졌다. 이제는 그 당시 이곳에 올랐던 산꾼들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건물이다. 샘터에 자리를 잡고 주섬주섬 보온도시락과 보온물병을 꺼낸다. 겨자색 배낭의 그녀가 김자반과 달걀프라이를 준비했다. 손등으로 콧물을 닦아가며 사이좋게 나눠먹는다. 모든 것이 달고 맛나다.
바래봉 정상 |
바래봉을 두고 하산
정상이 코앞이지만 날씨와 체력을 감안해 가지 않기로 한다. 바래봉엔 끊임없이 눈이 내리고, 쌓이고, 별빛을 먹고 사는 요정들의 향연이 겨우내 펼쳐질 터. 아쉬움은 다음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된다. 겨울에 올랐다면 봄에 오르는 건 한결 쉽다. 소박한 겨울왕국을 보았으니 초록의 신록왕국, 분홍의 철쭉왕국도 봐야 한다. 배낭을 챙겨 임도로 내려선다. 하산은 지척이다. 산행을 하고 내려온 사이 길가의 눈은 제법 많이 녹아 있었다. 같은 하루인데도 오전에 오른 이와 오후에 오르는 이가 보는 산은 다르다.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배낭을 메고 한 남자가 오른다. 그 뒤를 눈보다 조금 덜 흰 개가 따라 올라선다. 배낭의 크기와 산행 시간으로 보아 남자는 오늘 바래봉에서 야영을 할 모양이다. 남자는 충견과의 하룻밤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지만 목줄에 묶인 개는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끙끙대고 있었다. 불쌍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제발 주인좀 말려달라고. 눈 오는 날을 좋아하고. 털옷을 입고 있다 해서 겨울산행에 최적화된 동물은 아니라고…. “어머, 저 개는 올라가기 싫은가봐. 호호호.” 개의 간절한 눈빛과는 상관없이 주인은 앞만 보고 걸었고, 여자들은 주차된 차를 향해 가볍게 사라진다. 하얀 개는 그날 바래봉에서 따뜻한 밤을 보냈을까? 불빛 밝힌 텐트와 스토브의 온기, 조용한 음악, 머그컵 안에서 뜨겁게 솟는 커피향, 주인은 하얀 개를 품에 안고 함께 오지 못한, 어쩌면 언젠가 함께 왔을 법한 누군가를 그리워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중무장을 해제하고 차에 오른다. 출발할 때 마시고 남겨둔 아메리카노에서 아직도 커피향이 난다. 추워서 꼭 쥐었던 컵은 차갑게 식었다. 아이스커피처럼 목넘김이 시원하다. 쭈욱쭈욱, 남은 커피를 마시며 운봉을 벗어난다. 바래봉의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됐다.ⓜ
INFORMATION | |
남원 바래봉 구간별 거리 남원허브밸리(용산리) 주차장 - 운지사 - 임도 갈림길(3.2km) - 팔랑치 갈림길(1.0km) - 바래봉(0.6km) - 용산리 주차장(4.8km) 거리 약 9.6km 바래봉까지 오르는 길은 운지사 방향 산길과 임도, 두 가지로 나뉘는데 원점회귀이므로 올라갈 땐 산길, 내려올 땐 임도를 이용하는 게 좋다. 적설량이 많거나 눈 덮인 산길 산행에 자신이 없다면 오르내리는 길 모두를 안전한 임도로 선택해도 상관은 없다. 취재진은 러셀 상태를 확인하고 산길로 올랐다. 운지사 들어가기 전 왼쪽으로 표지기가 달렸고, 이후로는 외길이라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조망이 없는데다 꾸준한 오르막이긴 하지만 지루한 임도에 비해 걷는 재미가 있다. 1시간 30분쯤 올라서면 임도와 만나고 다시 30분을 올라서면 팔랑치 갈림길과 만난다. 이 갈림길에서 바래봉 샘터까지는 거의 평지다. 취재진처럼 바래봉 샘터까지만 갔다면 이후로는 평지에다 하산이어서 힘든 산행은 2시간이면 끝난다. 샘터에서 바래봉까지는 오르막이지만 사실 이 또한 큰 경사는 아니어서 힘들진 않다. 오가는 길 (지역번호 063) 터미널 연락처 /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 02-6282-0114, 동서울터미널 1688-5979, 시외버스 예매 사이트 www.busterminal.or.kr, 고속버스 예매 사이트 www.hticket.co.kr, 남원 시외버스터미널 633-0807, 남원 고속버스터미널 625-5391, 남원역 631-3229(1544-7788), 남원 택시 010-4130-0424, 011-651-8833 자가용 / 서울의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IC에서 17번국도, 또는 순천완주고속도로에서 오수IC로 나와 운봉까지 이동한다.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88고속도로에서 지리산(인월)IC로 나올 수 있다. 부산 경남권에서도 남해고속도로를 따르다 88고속도로 지리산IC로 나온다. 전북은 남원IC, 전남은 구례화엄사IC 등 거주지에 따라 가까운 IC를 선택한다. 주차는 용산리 허브밸리주차장에 한다. 비수기엔 관리인 없는 날이 많아서 좀더 위쪽까지 차량 운행이 가능하다. 적설량이 적을 땐 운지사 앞까지도 갈 수 있다. 원점회귀 산행이어서 가능한 등산로 가까이 차를 세우는 게 편하다. 기타 정보(지역번호 063) 숙식정보(지역번호 063) |
황소영 객원기자 emountain@emount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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