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구곡’이 빚은 풍경 속으로용이 노닐다 승천한 구룡계곡 3.7km
“구룡계곡에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 마리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군데 폭포에서 각각 자리잡아 노닐다가 다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본래 열두 계곡이 있으나 숫자 중에 가장 큰 수가 ‘9’인지라 구곡이라 칭하고 곡마다 용이 노닌 소와 호가 있다 하여 ‘용호구곡’이라고도 한다.” 구룡계곡 안내판 중에서
챙이소 부근에서 휴식중인 취재진. 구룡계곡은 제1곡 송력동을 시작으로 용소, 학서암, 서암, 유선대, 지주대, 비폭동, 경천벽, 구룡폭포까지 아홉 개의 절경을 품은 곳이다. |
지리산 구룡계곡은 전북 남원시 주천면에 있다. 주천면은 지리산둘레길 제1구간(주천~운봉)의 출발점이자 환형으로 연결된 둘레길 전체 구간의 시작이자 종점이 되는 곳이다. (공식적으론 지리산둘레길 구간에 번호를 붙이지 않는다). 구룡계곡 트레킹은 육모정이든 구룡폭포든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가 쉽지 않다. 육모정에서 시작해 구룡폭포까지 갔다면 왔던 길을 되짚어 육모정으로 돌아오거나 구룡폭포 주차장에서 택시를 불러야 한다.
거리를 늘려 지리산둘레길과 연계해 걷는 방법도 있다. 육모정~구룡폭포는 폭포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회덕마을(1.3km)로 내려선다. 회덕마을은 둘레길이 지나는 곳으로 이곳에서 ‘주천~운봉’ 구간과 만나 주천쪽, 그러니까 1구간 역방향을 따라 육모정으로 갈 수 있다. 반대로 구룡폭포부터 시작했다면 육모정에서 1구간 초입인 내송마을로 이동, 그후 회덕마을까지 둘레길을 걷고, 도로를 따라 구룡폭포 주차장으로 가면 된다. 둘레길과 연계할 경우 약 10여km의 ‘구룡폭포 순환코스’ 트레킹이 가능하다.
산행을 겸하고 싶다면 운봉 여원재에서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구룡계곡까지 갈 수 있다. 입망치~수정봉(804.7m)~구룡폭포~육모정 코스로 도상 거리 약 12km가 완성된다. 이번엔 육모정(탐방지원센터)에서 구룡폭포(주차장)까지만 걷기로 한다. 4km가 채 안 되는 거리로 쉬엄쉬엄 3시간이면 충분하다.
비폭동 일대의 단풍. 붉은 등을 켜놓은 것처럼 숲은 일순간에 색을 바꾸었다. |
구룡계곡의 아홉 풍경
구룡계곡은 제1곡 송력동을 시작으로 용소, 학서암, 서암, 유선대, 지주대, 비폭동, 경천벽, 구룡폭포까지 아홉 개의 절경을 품은 곳이다. 아홉 군데엔 들지 못하지만 길 옆 계곡과 거벽이 풀어내는 지리산의 풍경은 걷는 거리와 쏟아낸 땀에 비해 만족도가 높다. 정령치로 향하는 차량의 소음은 바위벽 너머로 먼지처럼 사라지고, 오롯이 하얀 돌 위를 넘나드는 차가운 물과 늦가을 바람만 메아리로 맴돌기 때문이다.
구룡계곡 트레킹 코스의 초반은 걷기 좋은 오솔길이다. 이후 지주대 출렁다리를 건너면서 서서히 오르막으로 변한다. |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면 한동안 걷기 좋은 오솔길이 이어지다 처음으로 ‘구시소’라는 이정표와 만난다. 물살에 패인 바위의 모양이 말의 먹이통인 구유를 닮은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챙이소’도 있다. 챙이는 곡식을 까불러 쭉정이를 골라내는 키의 이 지방 말이다. 스님이 끓어 앉아 독경하는 모습을 한 바위는 ‘서암’이라고 불리는데 제4곡에 속한다. 단풍은 유독 챙이소 주변으로 곱다.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유선대와 인간들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병풍처럼 쳐놓았다는 은선병을 지난다. 봄에 왔을 땐 유선대 계곡에 앉아 행동식을 먹었는데 이제는 골바람이 제법 맵다. 일부 산행객이 등산로 한쪽에 앉아 다리쉼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 다음은 지주대(6곡), 하늘을 떠받치듯 선 기암절벽 봉우리다. 계곡 위로 출렁다리(구름다리)가 걸렸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나무 널판을 이어 붙인 다리가 좌우로 춤을 춘다. 발아래 계곡이 왔다갔다 어지럽다.
육모정과 구룡폭포의 절반쯤인 ‘사랑의다리’. 계곡을 가로지르는 코스여서 중간중간 다리가 놓였다. |
지주대 출렁다리를 건너면서 길은 오르막으로 변한다. 숨도 고를 겸 계곡 옆 반석에 앉았다 가기로 한다. 매끈한 바위로 줄줄이 이동하던 중 일행의 발이 낙엽 수북한 바위 틈 사이로 스르륵 미끄러진다. 좁은 틈 속엔 낙엽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뭇잎은 그 속에 담긴 물, 그것도 썩어서 고약한 물을 완벽히 숨기고 있었다. 일행의 발목은 쑥, 물속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꺼내보지만 스며든 악취보다 빠르진 못했다. 구름이 많긴 했어도 간간이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비교적 따뜻한 날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줌마를 위한 변명
비폭동(7곡) 단풍나무 아래 배낭을 내린다. 반월봉에서 떨어진 물보라가 승천하는 용의 모습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갈수기여서 안내판만 보고는 비폭동을 정확히 찾아낼 수 없다. 사진 속 멋진 풍광은 만날 수 없지만 비폭동 일대의 단풍은 한여름 폭우 속 폭포만큼 경이롭고 아름답다. 등불을 켜놓은 것처럼 숲은 일순간 붉은 빛으로 물이 들었다. 이런 길에선 쉬어야 마땅하다. 가을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다시 선홍빛 숲을 만나려면 나이에 숫자 하나씩을 더 보태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떠나는 계절 위에 등산화를 올린다. 젖은 신발을 벗어둔 채 늦가을 햇살에 발을 보인다. 꾸리꾸리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산 아래로 흐른다. 질퍽질퍽 젖은 신발은 마를 기미가 없다.
휴식을 마치고 막 일어서려는데 위쪽 계단에서 색색의 재킷을 걸쳐 입은 여성 산꾼들이 쏟아져 나온다. 경사가 좁고 급한 곳이어서 내려오는 이들을 기다리기로 한다. 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냥 앉아서 기다려야겠다. 취재진이 앉자 내려오던 이들도 하나 둘 엉덩이를 붙이고 땀을 닦는다. 인천의 모 주부대학에서 온 팀이다. 무려 다섯 대의 버스라니 대략 2백여 명?! 보온병을 꺼내 물도 마시고, 새콤한 귤도 까먹는다. 급할 것도 없고 서두를 까닭도 없다. 일부는 우리도 같은 팀인 줄 안다. 선두가 먼저 와서 쉬고 있는 걸로 착각한 모양이다. 비폭동 일대는 순식간에 알록달록 등산복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지친 기색은 역력하지만 대체로 깔깔깔, 호호호, 먼 길을 달려 지리산 품안에 든 기쁨에 상기된 표정이다.
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그 상황이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도, 반달가슴곰을 방사하는 것도 산에 갈 일 없는 사람에겐 전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영유아 무상교육은 그 또래의 자녀가 없는 이들에겐 예산 낭비고, 주변에 수험생이 없으면 수능을 언제 치르는지 관심도 없다. 20대 때 생각했던 중년의 모습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두루뭉술한 몸매, 짙은 립스틱, 빨간 단체복, 시끄러운 목소리…. 하지만 중년이 되어보면 안다. 그것이 결코 흠 잡힐 일이 아니라는 걸. 아이를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인 여인들이다. 지금 저들이 흘린 땀은 제 다리로 걸어 뽑아낸 건강한 땀이고, 먼 길을 달려온 부지런함이다. 저들의 웃음소리는 아이와 남편과 시댁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맛보는 자유와 쾌락일 수도 있다.
“응? 우리 팀이 아니었네!”
2백여 명이 다섯 대의 차로 나눠 타고 왔으니 서로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긴 힘들 것이다. 우리는 그대로 그 팀이 되어 맞장구치고, 수다를 떤다. 얘기를 한참 하고 나서야 일행이 아니라는 걸 알고 머쓱한 웃음을 짓는다. 한팀이 아니면 또 어떤가. 산에선 누구나, 그게 중년이든 청년이든, 아줌마든 아저씨든, 처녀든 총각이든, 처음 만난 사이도 순식간에 친구가 된다. 때로는 지리산 종주길에 만난 꾀죄죄한 모습이 하산 후 도심에서 말끔한 모습으로 만난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을 수 있다. 정말, 잔뜩 멋을 부리고 나온 도심 속 산꾼은 때가 낀 산속보다 결코 멋있지 않았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서먹한 모습으로 돌아서던 기억…. 왜 당신은 산에 있을 때 가장 멋있고 예쁠까?
소나무가 되어버린 용
구룡계곡은 지리산의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에 가려 빛을 못 본 곳이지만 가벼운 트레킹장소로 손색이 없다. 지리산둘레길 '주천-운봉' 구간과 연계해 걷는 것도 좋다. |
비폭동부터는 계단 오르막이다. 내려오는 이는 무릎이 흔들리고 올라가는 이는 몇 번씩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라야 한다. 출발 전 입구에서 본 안내판대로다. 길은 폭포로 다가갈수록 점점 더 높고 가팔라졌다. 높은 곳에 서자 우리가 걸어온 계곡이 내려다보인다. 흐린 하늘 아래, 흐릿한 기억처럼 벌써 멀어진 계곡이다. 계곡은 멀어졌지만 이제 폭포는 코앞이다.
폭포로 가는 길엔 수령을 가늠할 수 없는 소나무들이 가득하다. 미처 하늘로 오르지 못한 아홉 마리의 용이 소나무로 변하여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 같다. 소나무는 폭포로 가는 이들을 향해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다. 떠밀리듯 걷다보니 물줄기가 보인다. 구룡폭포는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직폭과 부드럽게 흐르는 와폭의 중간 형태다. 물속에 잠긴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사이로 일어나 꿈틀거린 것 같다 해서 ‘교룡담(9곡)’이라고도 불린다.
폭포 전망대로 올라선다. 갈수기치곤 수량이 제법 많지만 용이 숨어 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 옛날 이 물은 또 얼마나 많고 맑았을까. 위에서 떨어진 물은 아래쪽 바위에 부딪혀 신비한 물안개를 피어냈을 것이다. 이제 용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용의 흔적과 늦가을 잔상을 더듬어 온 산행객뿐이다.
폭포를 돌아 주차장에서 택시를 부른다. 시작점 육모정까지는 택시를 타고 갈 요량이다. 남원에서 온 기사님은 부러 차창을 내리다. “차에 선팅이 돼 있어서 제대로 된 단풍을 보려면 문을 내려야 합니다. 춥더라도 조금 참으세요.” 육모정으로 돌아가는 도로 우측에 산능선이 걸렸다. 분명 우리가 걸었을 길, 그러나 정작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한 능선이다. 택시는 구불구불 휘어진 도로를 부드럽게 달린다. 택시가 한 구비씩 돌아설 때마다 가을은 그만큼 멀리 사라졌다. 산은 이제 겨울 차지다.
information -구룡계곡 | ||||||
구룡계곡 구간별 거리 거리: 약 3.7km
트레킹은 육모정 또는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시작한다. 주차를 어디에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육모정 주차장이 훨씬 넓고 안전하다. 육모정에서 탐방지원센터는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도보로 5분쯤 걸린다. 탐방지원센터 옆 이정표를 보고 내려서면 한동안 걷기 좋은 오솔길이 이어진다. 길 좌우측으로 계곡을 낀 터라 사계절 내내 풍광이 좋은 곳이다. ‘구시소’ ‘챙이소(서암)’ 등 이름이 붙은 명소마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길의 절반쯤에 ‘사랑의 다리’가 놓였고, 이후 유선대와 지주대를 지난다. 지주대 앞엔 출렁다리가 있다. 지주대를 지나면서 오솔길 위주의 트레킹 코스가 점점 오르막으로 변한다. 이후 비폭동부터 구룡폭포까지는 가파른 계단길이어서 막판 체력 소모가 심하다. 구룡폭포까지 간 다음엔 출발지인 육모정까지 되돌아 걷거나 구룡폭포 주차장에서 택시를 타야 한다. 오가는 길 터미널 연락처 /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 02-6282-0114, 동서울터미널 1688-5979, 시외버스 예매 사이트 www.busterminal.or.kr, 고속버스 예매 사이트 www.hticket.co.kr, 남원 시외버스터미널 633-0807, 남원 고속버스터미널 625-5391, 남원역 631-3229(1544-7788), 남원(구룡폭포) 택시 010-4130-0424(지역번호 063) 자가용 / 서울의 경우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순천완주고속도로에서 오수IC로 나와 춘향터널~육모정 방향으로 이동한다. 부산에서는 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88고속도로 이동 후 지리산(인월)IC로 나온다. 육모정 앞에는 무료 주차장이 있다. 탐방지원센터 앞에도 주차장이 있지만 도로 옆인데다 공간도 협소하다. 육모정 앞에 주차하고 시작하는 게 좋다. 구룡폭포 주차장에서 육모정까지 돌아가는 택시비는 1만5천원.
기타 정보
숙식정보 |
황소영 객원기자 emountain@emount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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