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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 자료☆★★/★☆ 등산 여행☆

남한강 기운 머금고 우뚝 솟은 여신(女神)의 산이야기가 있는 산하 _ 충북 제천과 단양, 금수산(1016m)

남한강 기운 머금고 우뚝 솟은 여신(女神)의 산이야기가 있는 산하 _ 충북 제천과 단양, 금수산(1016m)

     


글·사진 전종현_산 이야기 연구소 소장

0001(보문정사 앞에서 본 금수산과 망덕봉 설경. 온통 눈에 푹 잠기니 불교의 보금자리보단 신선들의 거주처로 변신한 느낌이다.)
▲ 보문정사 앞에서 본 금수산과 망덕봉 설경. 온통 눈에 푹 잠기니 불교의 보금자리보단 신선들의 거주처로 변신한 느낌이다.

북 제천에 있는 명산 금수산(錦繡山ㆍ1016m)으로 가는 길,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비가 내리니 아침부터 버스 분위기가 영 엉망이다. 아침잠을 보충하느라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나 차창을 통해 떨어지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 모두의 가슴에 새겨진 무늬는 ‘비가 오니 울적’이다.


충청도 땅으로 버스가 들어서자 내리던 비는 추운 날씨 탓에 싸라기눈으로 돌변한다. 금수산 들머리인 제천시 수산면 상천리 산수유마을 백운동에 도착했을 땐 눈발이 점점 거세지며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되었다. 백운동으로 향하는 도중 비가 멈추는가 싶더니만 비와 눈이 함께 내리는 진눈깨비로 변했다가 이내 비는 사라지고 눈만 펑펑 쏟아내는 마른눈이 되고 말았다. 날씨가 추워져 떨어지던 비가 얼어붙어 내리는 싸라기눈이 아니라 뭉치면 단단해지는 소나기 같은 눈이다. 날씨 너도 인간의 속과 같아 천길 물속과 달리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산행 후 귀경길이야 어찌되었든 하늘에선 솜뭉치 같은 눈을 마구 뿌려대니, 비가 올 때보단 기분이 상쾌해지는 게 마음은 동심의 세계로 달려가 울적함을 동구 밖까지 밀어낸다. 버스에서 내려 산행을 준비하는 일행의 마음은 산하를 덮은 흰 눈으로 환희 반 어수선 반이다.

0002(눈밭 속에 솟구친 철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흰 눈에 대한 찬사는 사라지고 원망스럽게 거친 숨만 몰아댄다.)
▲ 눈밭 속에 솟구친 철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흰 눈에 대한 찬사는 사라지고 원망스럽게 거친 숨만 몰아댄다.

한반도 산신이 남성으로 바뀐 까닭
들머리를 지나자 곧 보문정사(普門精舍)가 나타난다. 보문정사 앞에서 본 금수산과 망덕봉의 설경이 신비롭고 경이롭다. 관세음보살의 주재처라는 보문정사가 눈에 푹 잠겼으니 불교의 보금자리란 생각보다 신선들의 거주처로 변신한 느낌이다. 어느 산행객은 설경의 기묘한 조화와 정취에 푹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아주 넋을 놓아버렸다. 하긴 이런 선경(仙境)을 보고 묵상에 잠기지 않을 이 그 어디 있을까?


보문정사 내엔 돌로 쌓은 탑들이 가득하다. 금수산이 여산신(女山神)의 영역이라 했으니 혹 여산신의 음기를 가라앉히고자 돌로 만든 남근(男根)들을 쌓아놓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산행 중에 본 우뚝우뚝 솟은 선바위(입암ㆍ立岩)들의 수상쩍음과 백운동 반대편 오래천 곁 풍달촌 남근석을 세운 이유 또한 마을 어른들이 금수산 여산신이 유혹해 데려가는 동네 젊은 남정네들의 수명을 늘리고자 안간힘을 쓴 흔적이라니 하는 말이다. 여산신 거주처에 수기(水氣)의 정수(精粹)인 눈까지 펑펑 쏟아지니 오늘 금수산은 멋진 풍치는 물론 남녀 간의 묘한 정취까지 보너스로 줄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산신은 대부분이 여신이었다고 전한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세뇌교육이 슬슬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대부분의 산신이 남성으로 바뀌는 그야말로 산 속도 조선의 선비를 따라 소중화(小中華)의 세상이 된다. 예전 여산신 시절엔 산신을 성모(聖母), 노모(老母), 여신(女神), 할미, 할망 등으로 불렀는데, 산신이 남성화 되면서 산신이나 산신령 등으로 불리게 된다.


보문정사, 보문대사는 아미타불을 도와 고통 받는 대중을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을 말하니 혹 보문정사는 관음보살을 모시는 절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다. 관세음보살은 원통대사, 관음보살 등으로도 불리는데 유독 관세음보살의 이명(異名)만이 다양하다. 그 이유는 고통 받는 대중의 부름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현신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섣부른 추단이다. 정사(精舍)란 절을 뜻하는 낱말로 ‘승려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을 의미한다. 정사란 이름은 석가모니가 성불한 후 인도에 세워진 최초의 절 ‘죽림정사’가 그 효시다. 불교가 대륙을 거쳐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절’이나 ‘사(寺)’란 명칭을 많이 쓰게 된다. 유가(儒家)에선 정사를 해석하길 ‘경치나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곳에 있는 유자(儒者)들의 학문수양처’를 의미하기도 한다.


눈 덮인 금수산 봉우리 아래 우뚝 솟은 작은 전각은 산신각이다. 불가(佛家)에서도 산 중에 절을 세울 때 산의 임자인 산신령에게 인사를 드릴 요량으로 먼저 산신을 모신 후 그의 허락 아래 부처님을 모신 전각들을 세운다고 알려졌다. 눈 내린 정경으로 보아 보문정사 산신각 안엔 산신령보단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달은 도인이 앉아 있을 분위기다. 하긴 산신도 도가(道家)의 부름이니 산의 주인 산신이나 통달한 도인이나 매한가지일 듯도 하다.

0003(금수산이 눈에 파묻히니 이전에 불렸던 백운산이란 이름이 더욱 마음에 끌린다. 옛이름을 떠올리면 백설의 세상이 되는 것도 당연지사다.)
▲ 금수산이 눈에 파묻히니 이전에 불렸던 백운산이란 이름이 더욱 마음에 끌린다. 옛이름을 떠올리면 백설의 세상이 되는 것도 당연지사다.

물기운이 넘치는 금수산에 눈이 내린다
누군가 ‘가을날 산하를 물들이는 단풍은 여름 무더위를 견뎌낸 보상이고, 한겨울 혹한은 가을 단풍을 호사롭게 구경한 자에게 내린 벌’이라고 했다. 자연은 산행객들이 산천에 대해 오만해짐을 경계하고자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내리는 모양이다. 그럼 흰 눈은 그 벌(혹한)에 대한 꿀단지? 또 양춘가절(陽春佳節)의 만화방창(萬化方暢)은 겨울 폭설에 대한 보상?


마을 사람 중엔 “한적했던 고향마을 산골짜기에 등산복을 입은 산행객들이 몰려오면서 도시문명의 이기심까지 따라 들어왔다”며 불평을 하곤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도시의 이기심이 모두 가져가 버렸다”고 자조를 한다. 마을 어른의 푸념이 이해가 되는 이유는 내 스스로도 도심의 이해관계에 그리 넉넉하진 않다는 자격지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마을사람의 얘길 들은 주변 산객들이 갑자기 숙연해지는 걸 보고, 맹자의 성선설에 던진 한 표를 회수해 “사람들이 흰 눈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심이 원래 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 순자에게 돌려줘야 할까 보다.


갑자기 내린 눈으로 들머리를 벗어난 후부터 산길이 눈에 묻혀 오리무중이다. 일행은 오래골로 오르려던 애초의 코스를 변경해 정낭골을 통해 금수산 정상으로 향한다. 갑자기 코스가 바뀌고 또 내리는 눈으로 천지가 구분이 안 되니 앞을 밝힐 시야와 산길의 흔적은 기대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눈밭 속을 내딛는 앞선 산행객의 등산화 뒤축만 뚫어져라 보며 앞으로 전진이다.


해발 800m 정도 지점, 눈밭 속에 솟구친 철계단을 오르는 일행들은 거친 숨을 몰아대며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들머리에서 흰 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던 눈빛들은 이미 사라지고, 잔뜩 원망스런 눈망울들만이 눈밭을 구른다. 이렇듯 흰 눈을 대하는 마음이 산행 초와 달리 천양지차가 된 건 단 하나 눈길을 거니는 육신의 고통이 임계점에 달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일행 모두는 철계단을 오르며 고갤 들어 하늘을 볼 힘조차 없어 땅만 바라보며 거친 숨만 몰아쉰다. 고개를 푹 숙인 이유는 힘도 들지만 아마 그 동안 흡연이나 음주에 찌든 생활에 또 인간세상의 향락에 홀린 삶을 반성하는 중일 듯도 하다.


내린 눈은 찰기가 많아 잘 뭉쳐지니 일부 산행객들은 눈을 뭉쳐 철계단 아래로 던져 불특정 산행객이 눈폭탄을 만나 봉변을 당하는 장난질도 서슴지 않는다. 흰 눈은 산행에서 힘도 들게 하지만 어른들을 치기 어린 동심의 세계로 인도하는 요물단지도 되어준다. 예전 고향 땅 겨울철엔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렸다. 성인의 가슴팍을 웃도는 폭설에 어른들은 눈을 헤치며 길을 내기에 여념이 없었고, 어린 우리는 집과 집을 잇는 한길이 넘는 눈길 속을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 다닌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많이 쌓이던 눈이 언제부턴가 보기가 힘들어졌다. 인간이 변하니 자연도 변한 모양이다. 아니 자연이 변하니 인간이 변한 건가?

0005(품달촌 남근석공원에서 촬영한 음혈의 모습. 금수산은 여신의 기운이 강해 남근석 등으로 그 기운을 눌렀다고 한다.)
▲ 품달촌 남근석공원에서 촬영한 음혈의 모습. 금수산은 여신의 기운이 강해 남근석 등으로 그 기운을 눌렀다고 한다.

백암, 백운, 백악 등 다양한 이름을 지닌 산
용담폭포나 선녀탕이 눈 속에 다 묻혀 버렸기 때문에 언제 그곳을 지나쳤는지 알 수가 없다. 줄을 잡고 암벽에 올라서면 폭포와 탕을 볼 수 있다는데 눈 때문에 또 아이젠을 미처 준비하지 않은 일행들이 대부분인지라 그냥 정낭골로 올라간다. 아쉬운 맘은 가슴 속을 어지럽히나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


조선시대 영남 성리학파의 두 별 ‘좌퇴계(이황) 우남명(조식)’ 중 1인인 퇴계 이황, 그의 학문은 유성룡과 김성일 등 후학들의 명성으로 이어져 동인(東人)의 태두로 인정을 받았다. 이황 사후 퇴계 학파는 대대로 이어져 조선 후기 정가(政家)의 영원한 야당이라는 남인(南人)으로 남는다. 1548년 48세의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해 가을 단풍을 찬하며 “비단 위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고 했던 금수산, 그 이름 속 아름다움이 눈 속에 파묻히니 이전에 불렸던 백운산(白雲山)이란 이름이 더욱 더 마음에 끌린다. 금수산의 옛 이름이 백암산(白巖山), 백운산(白雲山), 백악산(白岳山), 상악산(上岳山) 등으로 불렸다니 이렇게 금수산이 백설(白雪)의 세상이 된 것도 어쩌면 당연지사다. 혹자는 퇴계가 비단이라 평한 후부터 금수산(錦繡山)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지만 어느 향토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그 이전부터도 금수산이란 이름이 있었다고 하니, 사물의 명칭이란 게 자연을 희롱한 인간이란 말에 수긍이 가긴 간다.


문명은 방수, 방풍, 투습, 보온 등에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는 기적의 섬유를 만들어냈다. 두 시간 이상을 눈 속을 뒹굴며 올랐지만 물기 하나 등산화 속을 적시지 못했다. 한때 하나뿐이던 기적의 섬유, 요즘은 같은 기능을 가진 원단이 다양한 종류로 쏟아져 나오니 아웃도어 의류의 평범한 섬유 중 하나로 인식이 될 뿐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선 경쟁만이 고품질과 가격인하를 불러오니 당연 대찬성이다.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돌린 뒤 순백의 설경에 다시 홀리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내 나이 반백을 넘었으니 앞으로의 삶은 동심 어린 자연적 세상에서 추위와 물기를 머금고 살 것인지 아니면 문명의 이기(利器)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마음앓이를 계속하며 살아갈 것인지? 멋진 설경을 보면 누군 무념무상에 빠진다는데, 왜 난 잡념잡상으로 머릴 채우는지 두고두고 고민해 볼 일이다.


일행 중 기운이 가득한 어느 산객은 스스로 눈사람이 되어 금수산 마지막 고비인 깔닥고개를 웃음바다로 만든다. 여러 치기 섞인 퍼포먼스로 우릴 즐겁게 하는 산행객을 보니 금수산 여산신의 산심(山心) 속에 남자를 홀리는 기운이 퍼져 있는 듯하다. 혹 금수산 산신령이 여산신이라 했으니 여성 산객보단 남성 산객들이 더 기운차고 활발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 낙목한천(落木寒天ㆍ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철 추운 날씨)의 겨울이니 펑펑 함박눈이라도 쌓이게 해 산행객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하려는 어머니 같은 여산신의 배려인지도 모를 일이다.


금수산 정상, 옛 이름인 백악산(白岳山)은 정상이 흰빛의 암봉으로 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른 정상은 이미 눈밭으로 흰빛만을 발하고 있으니 백악이던 백운이건 느낌은 매한가지다. 눈꽃 핀 나뭇가지 때문인지 힘이 든 듯 휘늘어진 등 굽은 솔이 정상을 홀로 지킨다. 정상에서 보는 서남쪽 충주호와 월악 영봉, 동쪽의 소백산 연화봉 등 주변 조망이 멋지다고 했는데 내린 눈빛과 연무로 사방은 온통 회색투성이다. 산 정상 둘레가 모두 회색 연무로 가득하니 오늘 금수산 정상은 오직 눈꽃 조망뿐이다. 그래도 함께 했던 산행객들은 정상의 백설세상에 취해 기분이 좋은지 하하호호의 연속이다.


금수산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뾰족하기 때문에 제대로 설 자리조차 없었다. 정상의 부족한 공간을 넓히고자 나무 데크로 정상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또 뾰족한 정상 바위로 오르내리기 편하게 철계단도 설치했다. 봄이나 가을 산행철이면 철계단은 설 자리조차 없이 체증이 빈발하고, 정상석 앞은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산행객들 사이에 각축전이 요란하단 소문을 풍문으로 들었다. 오늘은 폭설 때문인지 우리 외엔 산행객이 없다. 20여 명의 일행조차도 설 자리가 부족한 정상엔 남녀가 서로 뒤엉켜 기념사진을 찍었다.


금수산의 원래 이름은 단양 쪽에선 백악산(白岳山) 혹은 백암산(白巖山, 白岩山), 제천 쪽에선 백운산(白雲山)이라 칭했다. 아마 제천에서 금수산을 보면 흰 구름이 떠다니던 산이고, 단양에서 보면 흰 바위가 많이 보였던 산이었던 모양이다.


옛 선인(先人)들의 기록을 보면 ‘백(白)’ 자가 들어간 산은 정상에서 제천의식을 올렸던 산이라고 했다. ‘백’은 ‘ㅂ·ㄺ’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인데 ‘밝’이란 낱말이 들어간 산이나 봉우리들은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족(우린 고구려와 백제 등을 부여족이라 표현하고, 중국 측 사서에선 예맥족이라 기록)이 숭상했던 동명(東明)께 제를 올렸던 신성한 산이란 게 중론이다. 한반도 내 산악신앙의 퇴조는 외래 종교의 도래와 농경생활의 정착과 관계가 있다. 고등종교 불교의 산악신앙 습합 그리고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평야지대로의 생활습관 변화가 결국은 산악신앙을 산꾼에게만 남게 했다는 생각이다.

0004(남근석공원 안에 서있는 남근석. 이곳은 남성의 수명을 늘리거나 남아의 잉태를 기원하던 치성터였기도 한 듯하다.)
▲ 남근석공원 안에 서있는 남근석. 이곳은 남성의 수명을 늘리거나 남아의 잉태를 기원하던 치성터였기도 한 듯하다.

여산신의 기운을 달랜 남근석들
단양 상리 상학마을로 향하는 내림길에 아이젠을 미처 준비 못한 벌을 톡톡히 받는다.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두 발에 안간힘을 보태 버팀목으로 삼았는데, 하산길 어느 비탈진 암반 위로 올라 주변을 조망하고 내려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눈이 많이 쌓였고 또 찰기까지 있어선지 푹신한 이불 위로 떨어진 기분으로 쿠션도 이런 쿠션이 없었다. 함박꽃처럼 눈발이 굵고 탐스러워 이름조차 함박눈인 그 눈이 쌓여 아직 물기조차 머금지 않았으니 이불 중에서도 신혼부부의 포근한 원앙금침 솜이불이다.


조선시대 첫눈이 오면 임금님께 거짓말을 해도 무탈한 날이었다고 전한다. 아마 현대의 만우절이 옛날엔 첫눈이 오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눈이란 예나 지금이나 또 어른이나 애들에게나 모두에게 신나는 날이었던 듯하다.


하산길에 금수산 지도를 꺼내보니 약수터인 옹달샘도 있고, 절터(절마당)도 눈에 띈다. 눈밭 속 러셀을 하며 내려오는 어수선한 분위기라 그랬는지 그 모두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하산길도 연무로 인해 조망 또한 전혀 없으니 현재의 위치조차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정신을 차릴 순간도 없이 당도한 곳이 ‘남근석공원’이다. 지도 상 남근석공원을 확인하니 안도감과 더불어 피로감이 밀려온다.
남근석공원 안내판엔 “상리에서 보면 금수산 정상 부근의 모습이 마치 여인이 누운 모습이다. 예부터 음기가 강한 지기(地氣)를 품고 있어 이곳 주변 마을 남자들의 수명이 길질 못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오래천 주변인 이곳 품달촌에 남근석을 세워 그 음기를 눌러 남자들의 수명을 연장했다. 품달촌에서 신혼부부가 초야를 치르면 귀남(貴男)을 얻고, 아기를 잉태하지 못한 아낙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갖는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곳이 구한말에 파손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됐다”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남성의 수명을 늘리거나 남아의 잉태를 기원하던 비보처(裨補處)요, 치성터란 얘기다. 금수산 정상 동편에도 치성단이 있고, 족두리바위 또는 독수리바위 등 우뚝 선 선바위도 많으니 옛날 누군가 여산신의 기운을 제어하고자 혹은 음양의 이치를 살려 조화롭게 하고자 산 속 곳곳에 남성의 상징이 되는 상(像)을 세워 여산신의 음욕을 충족시켜준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금수산 서편 망덕봉에서 충주호 방향으로 가는 암릉을 ‘소(小) 용아릉’이라 부르는데, 암릉 상에 있는 봉우리가 여성에겐 미인봉(596m)이요, 남성에겐 저승봉이란 이름까지 얻는다. 하긴 금수산 주변 제비봉, 동산, 구담봉, 옥순봉 등에도 남근석이 많으니 이곳 주변이 원래 음기가 가득한 이유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남한강 수기(水氣)를 듬뿍 받은 땅 때문은 아닐까?

0006(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상학마을에는 소나무와 노인들이 남아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상학마을에는 소나무와 노인들이 남아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곧은 나무가 아닌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先山)을 지킨다’고 했던가? 산골마을엔 등을 곧추세운 젊은이들은 이미 다 떠나고, 등 굽은 노인 분들만이 남아 조상이 물려준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찬가지 선조들이 모셨던 마을의 수호신 성황당 역시 등 굽은 소나무와 노인 분들이 모신다. 단양군 적성면 상리 상학마을 성황당, 제천 쪽 산수유마을인 백운동과 마찬가지로 성황당 앞엔 술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신을 모시는 방법으론 예부터 맑은 술과 깨끗한 물을 바친 후 가무(歌舞)로 신을 즐겁게 한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이 망국(亡國)의 폐주에겐 도덕적으로 훼손을 입히는 고사성어로 쓰이지만, 흥국(興國)의 제왕에겐 부국강병을 위한 하늘에 올리는 제례의 일종으로 쓰였다. 제례엔 당연 음주가무가 뒤를 이었으니 음주가무는 제천의식 중 하나의 의례였단 생각이다. 산정(山頂)에서 지내는 전래의 제천의식 중 주된 제례는 가무로 시작해 음주로 끝이 났다. 그러니 음주가무가 뛰어난 우리나라가 예부터 ‘신의 나라’였다는 소리는 틀림이 없는 사실인 듯하다. 지금 한류라는 이름아래 노래와 춤 등 예능방면으로 세계를 주름을 잡는 것도 다 천신과 조상님들의 음덕이 이제야 발휘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상학마을로 내려오자 산행 내내 일행을 짓굿게 따라 다니던 회색구름이 물러가고 이제야 하늘이 맑게 열린다. 지금부터 산에 오른다면 금수산 전망은 좋겠지만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난발이니 이도 저도 다 귀찮다. 오늘 금수산 산행의 전망은 난망이었지만 흰 눈 만큼은 실컷 본 눈꽃산행이었다.

제천이나 단양 쪽이나 금수산 아래 마을은 한적하기 보단 온통 식당 투성이다. 누군가 “산은 산, 물은 물이어야 하는 산골짜기 마을 속엔 산도 돈이고 물도 돈이 되었다”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요즘 세태를 읊더니만 내 머리 속도 똑같은 생각인지 가슴만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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