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우리말처럼 쓰인지도 오래다. 힐링캠프, 힐링푸드, 힐링명소 등 다양한 단어에 접두사로 쓰이며 사람을 치유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사람에게 힐링을 주는 대상으로 자연만한 것이 없다. 일상에서 쌓인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는 자연을 찾으면 대부분 치유된다. 자연치유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이기도 하다.
봄의 깊이가 더해가는 5월, 자연치유도시 제천을 찾았다. 내륙의 바다라고 불리는 청풍호와 함께 월악산, 소백산, 치악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자연의 고장. 하늘을 닮아 푸른 숲과 가슴까지 시원하게 하는 맑은 공기, 눈을 돌리는 곳마다 이어지는 절경에 자연이 주는 힐링을 체험하기에 더 없이 좋다. 바쁜 일상에서 어제와 똑같이 지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대, 제천으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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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담봉 정상은 산의 높이에 비해 대단한 풍광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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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찬란한 봄날,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햇살이 가만히 이마에 내려와 닿는다. 볼에 느껴지는 솜털 같은 바람, 수풀의 초목이 내어주는 상쾌한 향,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재잘대는 나뭇잎의 속삭임. 눈을 감아야 더 깊이, 더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는 5월, 봄이다. 계절은 정직하여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봄은 이내 지난다. 봄과의 이별이 못내 아쉬워 자연이 그려놓은 산수화, 제천 월악산 구담봉(330m)을 찾았다.
봄날의 행운 구담봉을 향해!날씨를 걱정했는데 봄날의 푸름 치곤 꽤 만족스러운 하늘이었다. '늘 봄 날씨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년 이맘때면 되뇌는 말이지만 오늘 역시 입안을 맴돈다. 매월 좋은 산을 찾아 전국을 다니는 기자지만 유달리 청명한 날씨에 기대감이 달랐다. 여기에 이번 달은 제천. 천혜의 자연환경에 내륙의 바다라고 불리는 넓고 잔잔한 청풍호가 어우러진 도시다. 제천엔 빼어난 산이 여럿이지만 충주호를 중심으로 월악산 능선이 그림처럼 이어진 구담봉을 찾는 건 봄날의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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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에선 한참동안 평평한 길과 나지막한 언덕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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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서둘러 들머리까지 줄달음했다. 산행은 충북 제천과 단양의 경계에 위치한 계란재에서 시작한다. 이곳엔 제천을 상징하는 캐릭터와 관리초소, 대형지도에 주차장 등이 조성돼 있다. 하지만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아 넋 놓고 운전하다가는 지나치기 쉽다.
차에서 내려 산길에 올랐다. 초입은 비교적 평평하다. 도시에서 떠나온 일행에게 숲은 이내 자연에서의 쉼을 허락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길 위에 알록달록 무늬를 만든다. 밟고 지나기가 아까워 길 밖으로 걸었다. "산길에 접어드니 정말 고요하네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서 좋은데요?" 고요한 숲에 들자 일행의 마음을 대변하듯 여기자가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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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를 손등에 얹어 놓으니 꾸물꾸물 움직인다.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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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언덕은 처음엔 쇄석이 깔린 돌길로 시작했다가 흙길로 이어졌다. 그리고 농업용 도로로 쓰이고 있는 콘크리트 포장길로 바뀐다. 언덕 하나를 지나니 탁 트인 분지가 나타났다. 누군가 장사를 하며 작물을 키우려는지 비닐하우스 같은 허름한 임시가옥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땅을 개간한 흔적이 보였다.
자연에서만 얻을 수 있는 휴식콘크리트 포장길을 30분쯤 걸어 다시 숲으로 접어들었다. 자연스레 그늘이 생길 만큼 숲이 울창했다. 걷다 보니 길 한복판 허공 위로 곳곳에 벌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자벌레다. 자나방의 유충인 이 녀석은 나뭇가지처럼 생긴 모양 덕분에 천적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거기다 거미줄 같은 연한 실을 몸 밖으로 내어 공중에 매달리기도 하는데 이 모두가 생존을 위한 것이다. 이 작은 한 마리의 벌레조차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몸부림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그저 대견하다. 손등에 올려놓으니 꼬물꼬물 기어오른다. 누군가에겐 징그러울 수도 있을 텐데 마냥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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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접어드니 울창한 숲 덕분에 자연스레 그늘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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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은 통나무 계단과 흙길이 반복되며 오롯한 자연을 느끼게 해줬다. 경사가 조금 가팔라지나 싶은 찰나 저 앞으로 삼거리가 나타났다. 옥순봉과 구담봉 탐방로로 갈라지는 쉼터다. 이곳은 옥순봉쉼터 혹은 구담봉삼거리라고도 불린다. 좌측 직진으로 난 길을 따르면 옥순봉으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르면 구담봉으로 갈 수 있다.
이곳에 잠시 앉아 숨을 돌렸다. 봄이 품은 숲에서 싱그러운 향이 진동한다. 약초 냄새 같기도 하고 풀 냄새 같기도 한 향은 쉬고 있는 일행에게 휴식과 함께 새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늘 하는 얘기지만 혼자 올라온 게 아쉬워요. 가족과 함께 오면 좋을 것 같아요.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평온함이 있어요." 여기자의 얘기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본격적인 산행에 오른 것도 아니지만, 산행에서 흘리는 땀은 도심에서 흘리는 땀과 확실히 달랐다.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몸 밖으로 배출해주는 것이 바로 자연에서 흘리는 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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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암릉 구간을 걷기에 앞서 등산화 끈을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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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산수화에 빠져들다등산화 끈을 꼼꼼하게 조이고 구담봉으로 출발했다. 쉼터에서 구담봉 정상까지 구간은 600m로 짧지만 암릉이 주를 이루고 곳곳에 급경사도 있어 만만치 않다. 5분쯤 걷자 시야가 탁 트인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절경과 조우하는 순간이다.
"힘들어도 산행하는 이유가 바로 이 맛 때문이지. 산수화나 풍경 사진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실물이 더 대단하니 어떻게 산을 찾지 않겠어." 기자가 일행을 앞서며 너스레를 떨었다. 순간 웃음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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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비탈길이 곳곳에 있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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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가파른 곳엔 철 난간이 설치돼 있어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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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암릉이 늘어서있고 저 멀리 충주호가 한쪽 어깨를 드러내며 산꾼을 유혹한다. 정점에 도달한 봄은 숲을 끌어안고 성큼 다가온 여름과 가벼운 밀당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날은 기온이 25°에 육박한 탓에 볼에 닿는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하지만 물기가 가득 오른 숲엔 더없이 좋은 자양분이었다. 싱그러웠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발아래 풍광은 말 그대로 그림 같았고 우리는 그림을 관람하는 관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연에서 살면 말 그대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삶일 것 같다. 그런데 실제 그런 사람이 있었다. 조선 인종 때 문신·학자이며 청풍군수를 지냈던 이지번(李芝蕃, ??1575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했었다. 당시 구담봉 일원을 유람하며 지내는 이지번을 보고 사람들은 '푸른 소를 타고 강산을 청유하며, 칡덩굴을 구담의 양안에 매고 비학을 만들어 타고 왕래하니 신선과 같다'고 했다. 이곳에서 물아일체를 실현한 장본인이다. 더욱이 이지번은 조선시대에 이미 칡덩굴로 동아줄을 엮어 구담봉 일대를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하니 어찌 보면 국내 최초의 클라이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스스로 칡덩굴로 등산용 자일을 만들었다니 그저 놀랍다.
거북바위여 내가 왔노라!여기서 보는 풍광도 아름답지만, 진짜는 구담봉에 있다. 구담봉까지는 두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암릉으로 둘러싸인 봉우리는 장미의 가시처럼 아름다운 만큼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암릉에 난 길을 따라 비탈을 내려갔다. 경사가 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철난간이 나타났다. 주의만 한다면 난간을 꼭 붙잡고 내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갔는지 봉우리 내리막 주변의 바위와 나무 위에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많다. 손이 닿는 곳이라면 일부러 광택을 낸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눈앞으로 구담봉이 나타났다. 거북바위다. 기암절벽 위에 우뚝 선 바위가 마치 거북이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이리저리 봐도 솔직히 모르겠다. 구담봉으로 오르는 철계단이 건너편에서 봐도 아찔하다. 이 철계단은 평균 70도 정도의 가파른 구간에 설치된 것으로 조금 과장하면 수직으로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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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봉쉼터에서 구담봉까지는 두 개의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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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 없이 철계단으로 향했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더욱 가관이다. 올라간 철계단 그대로 하산해야 하니 내려올 때가 더 아찔할 것 같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점입가경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저 멀리 좀 전에 쉬었던 쉼터 우측으로 옥순봉도 조망된다. 시간만 괜찮다면 옥순봉까지 들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수직에 가까운 계단을 오르니 금세 등에 땀이 났다. 마지막 봉우리는 높이가 고작 50m 남짓인데 들머리에서 쉼터까지 걸었던 나지막한 1.4km 구간과 견줄만했다. 봉우리 정상에 오르고 나니 세상이 전부 내 발아래 와 있었다. "월악산아, 반갑다. 거북바위야 내가 왔다!" 입에서 거북바위를 향한 반가움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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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계단은 평균 70도 정도의 가파른 구간에 설치돼 있어 수직의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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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기암괴석이 많아 어디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어도 그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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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m 구담봉, 그 이상의 절경정상석을 돌아 저만치 앞에 있는 전망대로 향했다. "캬~! 대단한데요? 우리나라가 아닌 것 같아요. 이 정도 높이에서도 이런 풍광이 가능하구나." 말 그대로였다. 국내 어디에서 이 정도 높이를 오르고 이런 절경을 마주할 수 있을까.
구담봉은 산행의 난이도나 들이는 시간에 비해 다른 산과 비교해도 훌륭한 정상 풍광을 가졌다. 올라오면서 만나는 경치도 좋지만, 정상이어야만 보고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존재했다. 산행을 준비하면서 온라인과 책자 등에서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대단했다.
눈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충주호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곳곳에 가은산(575m), 금수산(1015.8m), 가은암산(580m), 제비봉(721m), 문수봉(1161m), 영봉(1097m), 두무산(474m), 옥순봉(283.3m) 등이 떡하니 서 있어 산을 주제로 한 3D 입체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발아래 충주호 역시 잔잔하지만, 역동적인 힘을 가졌다. 하늘을 유영하는 거대한 용처럼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굽이쳐 흘렀다.
여러 산을 다니다 보면 올라가는 수고에 비해 정상에서 느끼는 만족이 적을 때가 있다. 계절이나 날씨 탓도 있지만 모든 산의 풍광이 절경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만난 풍광이 정상에서 보는 경치보다 아름다운 때도 있다. 하지만 구담봉은 단연 정상이 좋았다.
올라온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 내려가야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들머리에 닿을 때까지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계절을 달리하고 다음에 찾아온다면 그땐 어떤 풍광일지 구담봉의 다른 모습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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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가팔라 철계단을 오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경치를 구경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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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담봉의 높이는 330m다. 제천과 단양이 맞닿은 곳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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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담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어떤 산수화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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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용 차장 | 사진 양계탁 기자 / music@outdoo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