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히 다가온 여름이 반갑지만은 않다. 들이켜는 숨에 더운 기운이 따라 들어온다. 이런 날엔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느린 하루를 보내고 싶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가 그늘을 내어주고 맑고 투명한 계곡물이 시름을 씻어내 준다. 그런 곳에선 도시생활에 지친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다.
여름엔 홍천이 명당이다. 우리 땅에서 시와 군 가운데 가장 큰 면적을 가진 홍천. 군 전체의 87%가 산지로 이루어져 자연스레 청정지역을 이루었다. 오염되지 않은 산하는 홍천을 찾는 이의 몸과 마음에 쉼과 위로를 준다. 이번 달은 홍천을 대표하는 산과 계곡으로 향했다. 초록으로 물들인 산에 여덟 봉우리가 병풍을 두른 팔봉산과 유리알 같은 홍천강 최상류에 비밀처럼 간직된 용소계곡이다.
봄이 짧아진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올해는 유난히 여름이 빠르다. 벌써 덥다. 6월에 들면서 조금 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34.9도. 1907년 기상 관측을 시작하고 108년 동안 6월 상순 기온으로는 최고란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면 얼마나 더 더울까. 이런 더위엔 시원한 강이 내려다보이는 골산이 제맛. 홍천강이 휘감아 도는 100대 명산 팔봉산(327.4m)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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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은 높지 않지만 풍광이 뛰어나고 산행의 재미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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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기 가득한 들머리에 서다더울 땐 그저 그늘에 앉아 쉬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쉬는 것도 한두 번, 이번 더위는 피하기보다 이겨내는 게 몸에도 마음에도 유익하겠다. 여름은 한참인데 벌써부터 피한다면 긴긴 삼복더위가 고역일 테니 말이다.
여름의 초입, 오르는 재미 가득하고 사방으로 풍광까지 빼어난 산을 찾다 보니 홍천의 팔봉산이 떠올랐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출장지는 홍천으로 정해졌다. 연일 덥던 차에 홍천을 떠올리니 순식간에 더위가 가시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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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에 접어들면 곧바로 가파른 언덕이 막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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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산과는 달리 들머리가 사파리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철문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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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고 한참, 강원도에 접어들어 굽이굽이 산길을 따르니 빽빽한 초목이 반긴다. 벌써 눈이 시원해진다. 들머리 인근에 차를 세워두고 매표소로 향했다. 팔봉산이라고 쓰인 나무 명판 아래 남근석과 남근목이 우뚝 서 있다. 남성성을 노골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라 살짝 민망하기도 한데 해학이 담겨 있어 미소가 지어진다. 팔봉산에 음기가 많아 산행 중 사고가 빈발해 이를 중화시켜 사고를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곳까지 오며 느꼈던 더운 기운이 일순간 덜해진 것 같다.
매표소를 지나면 철문을 통과해서 등산로에 접어든다. 산행 들머리로는 조금 생소하다. 맹수가 뛰노는 동물원 사파리에라도 입장하는 기분이다. 대낮인데 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한 기운이다. 음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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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오르막만큼이나 내리막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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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아등산로에 오르면 곧바로 가파른 언덕이 나타난다. 나무 계단도 흙길도 걷지만 1봉부터 녹록지는 않다. 여덟 개 봉우리를 순서대로 올라 이열치열 하겠다고 왔는데, 초장부터 찬물을 끼얹는다. 매표소에 가득했던 음기는 온데간데없고 벌써 땀이 줄줄 난다.
"팔봉산이 높지 않지만, 위험하다고 하더니 처음부터 엄청 가팔라요. 예전엔 정말 사고가 잦았겠는데요?" 여기자 둘이 거친 숨을 쉬며 한마디씩 했다. 벌써 지친 기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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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봉에 오르면 사방이 열리면서 다른 봉우리와 함께 홍천강까지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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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이 가까워지니 경사가 더 심해졌다. 머뭇거리다간 더 힘들 것 같아 크게 한 번 호흡하고 단번에 올랐다. 산이 높지 않고 위험한 구간엔 어김없이 안전시설이 설치돼 있어 숨이 턱까지 차기도 전에 1봉 정상을 밟을 수 있다.
1봉에 오르니 2봉을 시작으로 앞으로 올라야 할 봉우리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산이 골산이라 봉우리마다 암릉이 절묘하다. 숲과 어우러진 풍광도 꽤 아름답다. 팔봉산은 봉우리가 8개라 팔봉산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감물악(甘勿岳)이란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산에 '악' 자가 들어가면 '악' 소리가 날 만큼 힘든 산이라 하지만 원랜 바위가 많은 산이란 뜻이다. 팔봉산이 감물악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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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구간에는 로프나 철손잡이, 철계단이 놓여있어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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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에서 2봉으로 향하는 길은 오르는 구간만큼 내리막도 만만치 않다. "1봉을 오르내리는 게 이 정도인데 오늘 8봉까지 갈 수 있을까요?" 산행에 처음 따라나선 막내 기자가 걱정을 섞어 한마디 툭 내놓는다. 팔봉산이 초행이라면 1봉을 오르내리면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들머리에서 8봉까지 모두 올라 원점회귀 하는 데까지 3~4시간 정도라고 말하는데 보통은 1봉을 지나면서 40분 정도를 소요하니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산은 직접 올라봐야 안다. "걱정 마. 1봉만 지나면 금방이야." 막내를 다독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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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쳐 흐르는 홍천강 풍광을 조망하며 산행을 즐기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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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인이 끌어안은 산의 정기2봉을 오르는 길도 제법 경사가 있다. 하지만 탄력을 받아서일까 금방 정상에 올랐다. "저쪽에 무슨 건물이 있어요." 좀 전까지 풀죽어 있던 여기자가 2봉 정상에 오르자 혈색이 돈다. 2봉 정상엔 삼부인당이 있다. 삼부인이 누구인지 알려진 건 없다. 그저 세 부인이 이곳 근처에 살다가 사후 신봉이 되었다는 설과 하늘과 땅, 물의 신을 상징적으로 의인화했다는 설이 있다. 이 삼부인은 시어머니 이씨와 딸 김씨, 며느리 홍씨 신(神)을 가리키는데 이씨는 인자하고 김씨는 더욱 인자한데 반해 홍씨는 너그럽지 못해 당굿을 할 때 김씨가 내리면 대풍년을 하고 홍씨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 집안의 안녕과 풍년을 기리던 신앙 일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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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풍광을 내려다보려고 기자가 3봉 인근의 봉우리에 올라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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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인당을 모시는 보살에 의하면 원래 당집은 8봉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봉우리 아래 홍천강에서 여름이면 사내들이 옷을 훌훌 벗고 미역을 감아 삼부인신이 이를 보기 흉하다고 하여 지금 장소로 옮기게 되었다고. 지금 말로 조금은 '까칠한' 부인신(?)들이었는가 보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는데 팔봉산이 음기 가득한 여산(女山)으로 불리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자 둘이 당집의 문을 활짝 열고 소원을 빌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같은 여자의 마음이니 삼부인이 헤아려주었으면 했다. 일단 오늘 산행부터 안전하게 마치게 해달라고 빌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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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굴은 통과할 때마다 무병장수 하고 젊어진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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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의 고통 체험하는 바위굴3봉은 철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져 있어 오르기 좋다. 3봉에 오르면 언뜻언뜻 보이던 홍천강이 전경을 드러낸다. 굽이굽이 흘러와 팔봉산을 휘돌아 나가는 모양이 삼부인을 떠받드는 한 마리 용처럼 웅장하다.
3봉에서 잠시 쉬었다. 사방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대단하다. 327.4m 높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찔함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이 올라오며 흘린 땀을 식혀준다. 더위를 피한다는 피서(避暑)가 아닌 더위를 이기는 극서(克暑)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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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들이 삼부인당에서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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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힘을 얻어 산행에 올랐다. 3봉에서 하산하여 4봉 앞에 다다르니 길이 두 개로 나뉜다. 굴을 통해서 오르는 길과 철 다리를 건너서 오르는 길이다. 이곳에 서면 으레 망설여지지만 어지간하면 굴을 통해 오르라고 권하고 싶다.
이 굴은 팔봉산의 명물 해산굴이다. 해산굴은 좁은 바위틈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출산의 고통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틈을 통과할 때마다 무병장수하고 그만큼 젊어진다고 해서 장수굴이라고도 부른다. 인적이 없을 때야 망설인다고 하지만 주말엔 굴 앞에 긴 줄이 늘어서서 어지간히 인내심 없는 사람은 기다리기도 어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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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봉과 6봉은 팔봉산에서 어렵지 않은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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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앞장서고 그 뒤로 여기자들이 따라 붙었다. 머리 위로 사람 하나 들락거릴 만한 구멍 하나가 보인다. 생각보다 구멍이 작아서 덩치가 있는 사람은 지나가기 어렵겠다. 일단 구멍 밖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허공에 발을 허우적거리며 아등바등하다가 겨우 통과했다. 젊어지기 참말 쉽지 않다. 여기자들은 몸이 작아서인지 아직 젊어서인지 생각보다 쉽게 통과했다. 부럽다.
그런데 왜 해산굴일까. 해산의 고통을 체험한다고 쓰여 있지만 실상은 어머니의 입장이 아니라 아기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인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삼부인신 중 한 명이 4봉이 되어 이곳에 오른 사람을 품고 그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감내해 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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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 인근엔 흘린 땀을 식힐 수 있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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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산 유종의 미, 홍천강이전 봉우리에서 단련된 탓일까. 5봉과 6봉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여덟 개나 되는 봉우리를 지나는 산행인데 3~4시간 남짓이면 가능한 이유는 다소 쉬운 코스가 섞여 있어서다. 이마저도 힘든 사람에게는 언제든 중간에 하산할 수 있도록 여러 개의 하산코스도 있다. 1봉으로 올라갔다가 8봉으로 내려와 원점 회귀하는 코스가 정식 코스라면 처음 2봉과 3봉 사이에 하산 코스가 하나 있고 이후 5·6봉, 7·8봉 사이에 두 개가 더 있다.
부인이라는 말이 결혼한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니 산 주인인 삼부인들은 본디 어머니의 마음을 가졌으리라. 팔봉산 품에 안겼던 사람이면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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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가 단단히 고정된 로프를 잡고 경사를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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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며 7봉을 넘었다. 그리고 8봉을 마주했는데, 여기자가 멀찌감치 있는 경고판을 보고 "8봉은 위험해서 안 되겠어요. 여기서 하산하는 건 어떠세요?" 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8봉은 팔봉산 등산로 중 가장 험하여 안전사고가 자주 일어나니 등산에 풍부한 경험과 체력이 없는 부녀자, 노약자는 현시점에서 하산하라'고 쓰여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는 건 아쉽잖아. 일단 올라가 보고 도중에 위험하다 싶으면 돌아가자." 기자들을 다독여서 암릉에 올랐다. 긴장들을 한 탓일까, 이전 봉우리보다 쉽게 정상에 도착했다.
내리막도 생각보다 안전했다. 경사는 가팔랐지만, 워낙 안전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길게 연결된 철 손잡이를 붙잡고 하강하듯 내려오니 20여 분 만에 지상에 닿았다. 지상엔 철제 데크가 들머리까지 연결돼 있었다. 데크에 올라 홍천강을 곁에 두고 팔봉산 옆구리를 따라 걸으니 '언제 산행을 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몸이 개운해졌다. 날머리로 향하는 길, 일찍 찾아온 여름 더위와 산행하면서 흘린 땀을 강물에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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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으로 내려오면 홍천강을 곁에 두고 데크를 따라 원점회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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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용 차장 | 사진 양계탁 기자 / music@outdoo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