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려야 보이는, 낮은 지리산
야생화 융단 펼쳐놓은 섬진강 들녘
경향신문
지리산이 펼쳐놓은 들녘은 차진 햇빛을 이고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들판엔 야생화들이 넘쳐났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우리 꽃들이다. 앙증맞고 예쁘다.
지리산 아래 섬진강 물줄기가 순하게 흐르고 있다. 수변에는 각종 야생화가 지천이다. |
가을 지리산에 가거든 꼭 야생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색깔과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야생화는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히거나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보인다. 야생화는 바라보는 꽃이 아니라 들여다보는 꽃이다.
■ 생명의 들판-상사마을
백두대간 지리산 끝자락에서 섬진강으로 흩어지는 기(氣)를 다시 모아 백두대간으로 보낸다는 산이 있다. 오산(鼇山)이다. 오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영험한 산이다. 도선, 원효, 진각, 의상대사가 도를 닦아 사성암으로 불린다. 섬진강 물을 마시고 있는 자라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금오산이라고도 한다.
오산이 내려다보는 너른 들판이 상사마을이다. 신라말기 도선 국사는 우연히 모래 위에 그려진 삼국도(三國圖)를 보고 태조 왕건과 함께 삼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비옥한 땅이지만 도선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섬진강 모래 위 사도리(沙圖里)였다.
“섬진강에서 흘러온 모래밭을 옥토로 가꿀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이 근면하고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구례군 문화관광해설사 송진혜씨(35)는 상사들판의 풍요가 민초들의 땀과 눈물로 일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상사마을에는 “배 속에 있던 아이도 ‘옜다 호미’ 하면 튀어나와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드센 땅을 억척스럽게 일궈낸 농민들의 삶을 웅변하는 설화다. 정연권 구례군 농업기술센터 소장(58)은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야산을 깎고 다듬어 황금 들판을 만들었으니 농산물이 얼마나 소중하냐”고 말했다.
상사마을이 자랑하는 200년 된 고택 쌍산재에 들렀다. 얼핏 보니 조용히 공부만 하던 집처럼 아담해 보였지만 돌계단을 오르자 울창한 대나무 숲이 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밭의 규모도 놀라웠다. 서당이었다는 사락정에서 잠시 쉬었다가 오솔길을 따라 나 있는 좁은 문을 열었다. 야생화가 핀 저수지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상사마을 야생화는 화사했다. 화엄사 계곡에서 흘러 나온 맑은 마산천을 머금은 때문인지 지천에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그저 들에서 피어나는 들국화인 줄 알지만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다. 잎이 뾰족하고 하얀 것은 구절초요, 자색 빛이 도는 꽃은 쑥부쟁이다. 야생화의 강한 생명력을 닮아서일까. 상사마을은 전국 최고의 장수고장이다.
상사마을 쌍산재(위)와 오미마을 운조루 |
■ 풍요의 들판-오미마을오미(五美)마을은 다섯개 봉우리를 가진 오봉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멀리서 보니 다섯 봉우리가 우애 좋은 형제처럼 어깨동무하고 있다.
오미마을이 다산과 풍요를 뜻하는 옛이야기들이 아직도 전해진다. 천상의 선녀가 목욕을 하러 내려왔다가 쌍가락지를 떨어뜨렸다는 ‘금환락지(金環落池)’ 전설이다. 부귀영화가 마르지 않는 명당이라는 의미다. 오미리에 터를 잡고 살면 평생 고생 없이 산다는 것이다.
‘구름 위를 나는 새도 돌아온다’는 운조루에 가봤다.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간직한 운조루(1776)에 들어서니 ‘타인능해’ 글자가 붙은 나무쌀독이 보였다. 흰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독을 행랑채에 두어 누구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운조루 뒤편에는 노고단의 용이 섬진강을 끌어안은 모습을 닮았다는 왕시루봉이 자리 잡고 있다. 봉우리가 말 그대로 시루떡처럼 평평했다.
오미리에도 야생화가 깔렸다. 논두렁에 쑥부쟁이와 물억새가 하늘거리고 도루박이와 고마리가 다소곳하게 피어있다. 노란 감국과 보라색 꽃향유, 청자색 용담과 쥐꼬리망초, 며느리밥풀꽃들도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야생화 천국이라 할 만하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은 지리산의 장대함에만 도취되기 쉽다. 황금 들녘과 그 속에 피어난 야생화까지 봐야 어머니산의 진면목을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구례 | 글 정유미·사진 이준헌기자 you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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