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택자 우선’ 역행…‘무순위 추첨’ 열풍의 그늘
분양가 높아 미계약분 급증…돈 있는 다주택자만의 ‘줍줍 리그’
예비당첨 비율 늘리는 등 보완 시급…국토부 “과열 판단 땐 조치”
최근 분양시장에 청약통장을 쓰지 않는 ‘무순위 추첨’이 인기를 끌면서 무주택 실거주자에게 내집 마련 기회를 우선 제공한다는 청약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만 19세 이상이면 주택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보니 무순위 추첨 경쟁률이 1순위 청약보다 높은 모순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분양한 서울 서대문구 홍제역해링턴플레이스 견본주택에서 방문객들이 단지 모형도를 둘러보고 있다. <효성중공업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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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서울 서대문구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 미계약분 174가구를 분양받기 위해 5835명이 몰려들었다. 평균 경쟁률이 33.5 대 1로, 앞서 진행한 1순위 평균 청약경쟁률(11 대 1)보다 3배 이상 높았다.
무순위 추첨은 원래 청약 1·2순위와 예비당첨자 추첨까지 모두 끝나고도 위장전입 및 자격 미달이 확인된 부적격이나 계약포기로 인한 미계약분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됐다.
미계약분은 건설사가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데, 올해 2월부터는 청약시스템(아파트투유)을 통해 신청한 사람에 한해서만 분양할 수 있다.
문제는 미계약분이 급증하면서 빚어지고 있다. 이들은 대개 집값 급등으로 분양가도 높아지면서 계약을 포기하거나 무주택 기간을 잘못 계산하는 등 단순 실수로 부적격자로 분류된 경우다. 전체 당첨자의 5% 안팎이었던 미계약분은 최근 20%까지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동산 커뮤니티 등에서는 무순위 추첨을 자금 조달 능력이 있는 다주택자가 손쉽게 새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는 ‘특별공급’으로 공유되고 있다. 줍고 줍는다의 뜻의 ‘줍줍’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건설사들도 발 빠르게 분양전략을 바꾸고 있다. 무순위 추첨은 정식 계약 이후 신청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요즘은 정식 계약 이전에 신청자를 받는 방식이 확대되고 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사전 무순위 추첨은 총 몇 명이 신청했는지는 공개할 수 있어 고객 관심을 끌어올리는 데 효과적”이라며 “사후에 할 때는 미계약된 호수까지 공고해야 해 번거로운 점이 많다”고 말했다. 흥행 효과나 업무 효율성 면에서 사전 무순위 추첨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분양을 앞두고 사전 무순위 추첨 홍보에 열을 올리는 사례도 벌어지고 있다. 이달 말 분양하는 ‘방배그랑자이’의 경우 ‘사전 무순위 청약 안내’ 관련 홍보물을 배포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 공인중개사는 “전단지를 나눠주며 ‘당첨됐다가 포기해도 재당첨 제한 등 불이익이 없다’ ‘집이 여러 채 있어도 신청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강조하더라”며 “아무래도 사전 신청자가 많으면 착시효과를 일으켜 본 청약에서도 경쟁률이 뛸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통상 모집 가구 수의 1.8배까지 뽑는 예비당첨 비율을 규제지역에 한해 2~3배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볼 만하다”며 “예비당첨자는 상대적으로 가점이 높고 집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기회를 더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달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은 “무주택자가 청약을 포기하는 것은 높은 분양가 탓인 만큼 분양가가 실수요자가 부담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이 돼야 한다”며 “미계약분을 임대로 활용하는 등의 방식을 고민해야지 남은 물량을 유주택자에게 돌아가게 하는 공급방식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현재 무순위 추첨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단계로 과열양상을 띤다고 판단되면 조치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희 기자 mong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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