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서 못 받고, 안 줘서도 못 받는 ‘자살보험금’
논란이 지속되는 동안 피해를 본 건 가족의 자살로 인해 심리적·경제적으로 고통받아온 유가족이었다. 생보사들이 자살자 유가족에게 당초 약관에 기재된 대로 보험금을 지급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일이다. 하지만 보험 판매에만 혈안이 된 생보사들은 자살자 증가로 인한 보험금 부담이 늘자 뒤늦게 “약관에 문제가 있다”며 정당한 보험금 지급을 회피했고, 금융당국은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수년간 이를 방치하면서 일이 커졌다. 자살보험금 논란은 2003년 이후 14년간 ‘자살률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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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ㄷ씨는 2004년에 ㄱ씨와 동일한 재해사망특약을 추가해 생명보험에 가입했지만 수년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2009년 자살했다. 아내 ㄹ씨 역시 생보사를 통해 일반 사망보험금을 받았지만, 재해사망특약의 존재를 당시엔 알지 못했다. 수년간 생활고를 겪던 ㄹ씨도 2014년 언론 보도를 보고 추가로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생보사 측은 “보험금 청구 소멸시효(2년)가 지났다”며 지급을 거절했다. ㄹ씨는 최근 해당 생보사가 “미지급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뒤늦게 보험금을 추가로 받을 수 있게 됐다.
자살보험금은 자살자 유가족들 사이에서는 “모르면 못 받는 보험금”으로 통용된다. 보험 계약이라는 것이 워낙 복잡하고 미묘해 계약 당사자도 보장 내용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거니와 유가족이 정확하게 짚어서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이상 생보사들이 ‘친절하게’ 보장된 금액을 다 내주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자살보험금도 2014년 금감원이 ING생명을 미지급 건으로 징계하기 전까지는 극히 일부 유가족만이 받았을 뿐이다.
이기욱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처장은 “계약으로 보장된 권리를 행사함에도 자책감과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 탓에 유가족이 자살한 가족의 보험금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며 “실제 자살보험금 관련 공동소송에 참여한 유가족 대부분이 외부에 소송 사실이 알려지는 걸 극히 꺼려한다”고 밝혔다. 논란이 지속되는 동안 ‘자살보험금’이라는 말이 일반화됐지만 법적으로 자살보험금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 여부와 관계없이 보험계약자가 사망했을 경우 생보사가 지급하는 돈은 약관에 명시된 ‘사망보험금’이다. 사망보험금도 개별 계약 내용에 따라 금액에 큰 차이가 있다. 사례의 ㄱ씨와 ㄷ씨처럼 주계약인 생명보험에 자살사고까지 보장되는 재해사망특약에 가입했을 경우 주계약에서 보장하는 일반 사망보험금보다 금액이 2~3배 더 많은 특약에 따른 사망보험금을 추가로 받게 된다. 자살보험금은 바로 이 ‘특약에 따른 사망보험금’을 뜻하는 말이다.
생명보험에서는 자살로 인한 사망도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정신장해자 및 심신상실자의 자살, 과실에 의한 자살’의 경우 자살보다는 ‘사고’로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울증이나 음주 과다 등으로 인한 ‘심신상실 상태’에서 발생한 자살의 경우도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사유가 된다. 다만 생명보험에서는 사망보험금 수령을 목적으로 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보험 가입 후 일정 기간 동안은 자살 원인과 관계없이 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면책기간’을 두고 있다. 현 생명보험 표준약관에서 규정하는 면책기간은 2년이다.
2000년대 들어 생명보험 가입자는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생명보험협회의 집계자료를 보면 1994년 50.9%였던 가구당 민영 생명보험 가입률은 2000년에는 81.9%로 급증했다. 어느 한 생보사에서 괜찮은 설계상품이 나왔다 싶으면 약관까지 똑같은 상품을 곧바로 내놓고 따라가는 것이 당시 업계 관행이었다. 한 생보사 관계자는 “지금은 약관이 신고제이지만, 당시엔 금감원에 약관 허가를 사전에 받아야 했다”며 “약관을 새로 만들어 상품 출시를 하려면 허가받는 데만 몇 달을 기다려야 하다 보니 한 번 허가를 받은 약관을 가져다 쓰는 게 만연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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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보사들이 입맛대로 계약을 어긴 사례는 더 있다. 2015년 불거진 ‘예치보험금 이자 논란’이 대표적이다. 생보사들은 1997년 발생한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국내 금리가 높아지자 보험 계약자들에게 “만기된 보험료를 찾아가지 않고 예치하면 기존 이율(7.5%)에 1%를 추가로 얹어서 이자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많은 계약자들이 보험금을 예치했지만 이후 저금리가 지속되며 1%대까지 금리가 떨어져 예치금에 대한 이자 지출이 늘자 슬그머니 내부 규정을 바꿔 이자 지급을 중단했다가 물의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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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소비자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2016년 5월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자살보험금 지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금융소비자연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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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일차적인 책임은 실수였든 아니든 특약을 판매한 생보사들에 있다. 대법원도 판매된 생보사들의 책임을 인정했다. 지난해 5월 대법원은 “자살의 경우도 재해사망특약에서 명시한 재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며 생보사에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자살보험금 지급을 미루다가 결국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된’ 상황을 자초한 것도 생보사들이다. ‘빅3’만 해도 뒤늦게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키로 했지만, 3월에 있을 금융위원회에서 일정 부분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를 키운 책임은 금융당국에도 있다. 국감 등에서 공개된 자료를 보면 금감원은 2005년과 2008년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자살보험금 관련 분쟁조정을 한 바 있고, 이미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약관대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고만 밝혔을 뿐 생보사 중징계 등 구체적인 ‘액션’에 착수한 건 지난해 대법원의 판결이 난 이후였다. 금융당국이 문제 해결을 머뭇거리는 동안 자살보험금 미지급 규모는 수천억원대로 불어났고, 자살자 유가족은 유가족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보험업계와 시민단체에서 “생보사들이 대대적으로 약관을 손봤던 2010년, ING생명 사태가 불거진 2014년에라도 금융당국이 제대로 문제에 대응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당국의 뒷북 대응으로 자살보험금에 대한 사법부와 행정부의 판단이 서로 다른 ‘이상한 결말’이 빚어지는 결과도 초래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자살보험금 특약의 효력을 인정하면서도 같은 해 9월 “재해사망특약 보험금 청구소멸시효(2년)가 지난 사안은 지급 의무가 없다”는 별도의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자살 관련 일반 사망보험금을 청구한 지 2년이 넘은 유가족은 자살보험금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는 전체 미지급 건수의 절반에 달해 판결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반면 금감원은 소멸시효가 지난 유가족 상당수가 원칙적으로는 생보사의 미지급 행위로 인해 피해를 본 점을 들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도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생보사들 모두 이를 받아들여 소멸시효와 관계없이 자살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결과적으로는 대법원의 판단을 금감원이 뒤집은 꼴이 됐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결말이 향후 또 다른 자살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284만건의 재해사망특약 중 지금까지 문제가 된 자살보험금 사례는 2400여건에 불과하다. 남은 283만여 계약의 경우 향후 보험 계약자가 자살할 경우 이번과 마찬가지로 자살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다소 비극적인 가정이지만, 예컨대 이 특약에 가입한 말기 암환자가 유가족들이 자살보험금이라도 받을 수 있게 자살을 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보험연구원은 2013년 1월 ‘생명보험의 자살 면책기간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통해 “자살에 대한 사망보험금이 지급되는 보험 가입 3년차부터 가입자들의 자살률이 유의미하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자살 관련 면책기간을 폐지하면 자살률이 줄어들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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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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