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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대변신



골목길 대변신

 

 

 

 

#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솟은 빌딩숲 사이로 셀 수 없이 많은 차와 인파가 오간다. 큼지막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제각각 노랫소리는 귀를 어지럽게 하고, 화려한 쇼윈도 너머 마네킹들은 다들 비슷비슷한 옷을 입고 심심한 표정으로 서 있다. 분명 길은 널찍한데 대여섯 걸음에 한 번꼴로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지나가는 사람들. 명동이나 강남, 도심 속 거대 상업지구 풍경은 어느 곳이나 비슷하게 재미없고, 또 피곤하다.

추억 속 그곳은 달랐다. 잠깐 멈춰 서 고개를 들면 탁 트인 하늘이 펼쳐졌다. 친구들과 종횡무진 뛰어다녀도 거기서는 어느 것 하나 거칠 것 없었다.

매일경제

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 동진시장 일대를 찾은 행인들이 골목길을 걷고 있다. [김호영 기자]


 

 

 

 

 

 

 

 

 

 

조용하지만 꼬불꼬불 변화무쌍한 그곳을 돌아다닐 때 우리는 거대한 미로를 탈출하는 모험가가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돌아가길 원한다. 추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곳, 골목길로 말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대표적인 '비주류'로 여겨졌던 골목길이 이제 당당한 새로운 문화 거점으로 변신했다.

종로구 서촌이 대표적이다. 원래 한옥마을이 자리한 '북촌'이란 말은 있었지만, 서촌은 없었다. 북촌 서쪽에 있는 서촌이 하나의 고유명사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4~5년 전이다.

서촌 분위기는 북촌·삼청동과 비슷하지만 건물들이 더 소박해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라 정겨운 느낌을 준다. 북촌에 식상함을 느낀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기며 입소문이 났고, 편집숍이나 전통공예 매장, 작은 카페 등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기존에 있던 오래된 세탁소, 철물점이나 집들이 이색 점포와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하는 서촌만의 매력이다. 행인 박 모씨(27)는 "사실 골목길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지만 가끔씩 그 동네만의 독특한 매력을 느끼고 싶어 서촌 같은 곳까지 지하철을 타고 놀러오는 것"이라며 "취업 때문에 골치 아픈 요즘 한적한 곳에서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마다 서촌에 오는데 천천히 걷다 보면 아무 생각 없던 어린 시절 같기도 하고 마음도 편해진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해방촌으로 잘 알려진 이태원 경리단길은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골목길이다. 이제는 TV 속에서나 추억하는 달동네 느낌이 물씬 풍긴다. 1~3층짜리 작은 건물들이 늘어선 이곳에는 메인 골목을 중심으로 작은 가게들이 세계 각국 다양한 음식을 팔고 있어 옛 이태원역 일대 풍경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모세혈관처럼 퍼진 더 작은 골목을 파고들면 언덕 중턱, 막다른 길 근처 등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새로운 가게가 펼쳐져 즐거움을 준다. 행인 이소영 씨(25)는 "이국적인 정취와 우리 동네 같은 소박함이 더해져 편안한 느낌이 든다"며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처럼 과하게 '트렌디'한 모습만 따라가지 않으면 서울의 숨은 보물 같은 곳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골목길 위상은 상가 건물의 증감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2년과 2014년 서울시 자치구별 상업용 건물 건축허가 추이를 살펴보면 최근 인기를 끈 경리단길·한남동이 있는 용산구와 연남동·상수동이 있는 마포구가 가장 눈에 띄는 증가율을 보였다. 용산구는 실적이 57.7%(168건→265건) 늘어나 가장 큰 폭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연남동·상수동 등 인기 골목길이 위치한 마포구 실적도 24.9%(334건→417건)로 돋보이는 증가율을 기록했다. 반면 이 기간 관악구(-41.55%) 성북구(-28.28%) 동작구(-27.69%) 등은 큰 폭의 하락세를 기록했고 다른 자치구도 실적이 떨어지거나 10% 미만 증가율을 나타냈다.

사람들이 골목길을 찾는 심리는 옛날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전통을 그리워하는 '레트로스펙트(Retrospect) 현상'의 일종이라는 분석이다. 김기호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지금 인기 있는 골목길은 자연 발생한 도시의 것으로, 인위적이지만 자연 그 자체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존재"라며 "자연에 순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람들을 골목길로 이끄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오숙희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친 현대인들은 실용성만 따진 격자형 거리, 높은 빌딩 등에는 심리적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이와 동떨어진 장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한다"며 "도시에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골목길'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공간을 다닌다는 개성·정체성 찾기 일환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체제가 확립된 거대 상업지구에서는 남들과 다른 독특함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스마트폰 지도가 발달하면서 블로거들의 포스팅, 인터넷 커뮤니티의 입소문 등이 유명한 골목길을 탄생시키고 있다. 특이한 골목을 경쟁적으로 찾아 '나만의 단골'로 SNS에 공유하는 것이 일종의 보물찾기 놀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디어와 패기로 무장한 젊은 창업가들은 이런 심리에 승부를 걸고 직접 골목길 개척에 나서면서 골목길 활성화의 선순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백상경 기자 / 문재용 기자 / 박윤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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