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에 色이 번진다
털갈이 한창인 雪嶽을 가다
바람이 차가워지면 산은 끓어오른다
어느 날 이 짐승이 변해 새가 되려 하는데, 이 금수의 등 넓이 또한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온 힘을 다하면 그 활짝 편 날개가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계절이 끝나갈 무렵 깃털을 바다 쪽으로 날려 보낸다.
회오리를 타고 멀리 날아가서는 꼬박 1년이 지나서야
다시 참았던 뜨거운 숨을 내쉰다.
가을, 털갈이 한창인 이것의 이름을 설악(雪嶽)이라 한다.
-장자 ‘소요유’(逍遙遊)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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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식는다. 피부가 마르면, 몸에선 내풍(內風)이 인다. 고열을 앓으며 속으로 운다.
설악산. 이 동녘의 거대한 몸뚱이는 이렇게 한바탕 끓다가 체내를 다 쏟아내다가 긴 동면에 들 것이다. 맨몸이 되기 위해 고통스레 달아오르는 짧음이여. 마침 46년 만에 몸을 연 은밀한 부위도 있다 한다. 가자. 소요유(逍遙遊)할 시간이다.
46년 만에 입산이 허가된 만경대에서 바라본 만물상. ‘작은 금강산’으로도 불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에 흩어질 이 진귀한 변신을 놓칠세라 등산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다. 유의할 것. /양수열·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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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폭포. 바위의 사타구니를 물살이 질주한다. 물보라가 탄산수처럼 짜릿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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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탐하려면 새벽이 좋다. 오전 3시의 한계령. 보름에 이른 달이 눈알을 희번덕대며 산의 상반신을 샅샅이 핥는다. 내뱉는 숨이 입김이 된다. 몸이 금세 땀에 젖는다.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서북 능선은 상당한 근력을 요한다. 4시간쯤 야음을 거니는 동안,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산의 체모(體毛)가 바스락 신음한다. 해발 1460m. 밑을 내려다보니 구름이 얇은 요처럼 산허리를 덮고 있다. 고개를 든다. 동이 튼다. 색(色)이 시작된다. 농익은 주홍. 노을에 젖은 달뜬 얼굴.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은 벌써 겨울의 것을 닮아간다. 단풍은 줄기의 양분이 잎으로 이동하지 못해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전엔 보이지 않던 다른 색소가 나타나는 것. 그러니 이 계절 자체를 단풍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오전 7시, 끝청(1604m)에 이르러 구름의 입자가 실시간으로 이동하는 게 보인다. 얼마 뒤면 설악은 원래 제 이름의 풍경을 되찾게 될 것이다. 여기서 1시간 정도 더 가면 중청대피소. 빨간 사발면 국물로 몸을 데우고, 좀 더 가면 대청(1708m)이다. 사람들 얼굴이 홍엽(紅葉)처럼 벌겋다. 걸어온 방향으로 쭉 걸어 하산한다. 내려갈수록 색이 풍성해진다. 해발 1200m. 연두와 초록, 주황과 빨강과 노랑이 오색의 군무를 춘다.
해발 1100m 부근의 단풍이 시뻘겋다(왼쪽). 해발 1300m 부근. 이미 겨울의 초입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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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 때마다 부딪치느라 빨갛게 된 손바닥처럼 단풍잎이 나부낀다. 햇살이 관통하면 투명한 광물처럼 반짝이는 잎. 보석에 취해 위만 보면 위험하다. 발밑에도 뜨개질한 카펫처럼 떨어진 단풍잎이 이뤄낸 무늬가 한가득. 해발 950m, 멀리 폭포 소리가 들린다. 설악폭포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다람쥐가 도토리처럼 곳곳에서 출몰한다. 작은 낙차가 큰 물길이 되어 미물을 먹여 살린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빈말이 아니다.
오후 2시, 남설악 탐방지원센터로 내려와 오색약수터 주차장에 당도한다. 아까와 달리 몰려드는 인파로 정신없다. 월요일이라는 게 비현실적일 정도. 46년 만에 지난 1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임시 개방하는 만경대(萬景臺)에 오르려는 사람들이다. 북새통이라 20명씩 끊어서 입장시키는데, 주말엔 미어터진다. 부대낄 각오를 하는 게 좋다.
주전골의 가을. 가끔 음주 등산족이 보이는데, 절대 금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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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약수터 주차장 바로 옆이 만경대 입구지만, 코스를 제대로 즐기려면 아예 차 타고 더 내려가 오색약수터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 쇠 맛이 나는 오색약수를 한 그릇 떠먹고, 다리를 건너면 이른바 주전골. 이곳의 한 동굴에서 웬 도적 떼가 위조 엽전을 주조했다고 해 이름 붙었다. 길은 노약자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한데, 강원도 찐 감자를 툭 던져놓은 듯 기암괴석이 계곡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천불동 계곡의 독주암을 지나면 바위가 이등변삼각꼴로 쓰러져 작은 통로를 만들어낸 금강문이 나온다. 수호신이 지키는 문이라 한다. 아름다운 것에 잡귀가 미치지 못한다. 50분쯤 걸으면 용소폭포. 폭포 옆 바위는 1000년 묵은 이무기 암놈 한 마리가 승천하지 못하고 변한 것이라 한다. 절벽마다 물과 소나무가 있다. 육지의 경쟁에서 떠밀린 것들. 그러나 그 끝의 생장이 절경의 시작이 된다.
1시간 정도 걸려 만경대 입구에 다시 당도한다. 여기서부터 500m 정도 이어지는 오르막 깔딱고개를 넘으면 정면의 암벽이 전면을 드러내는 만경대. 망경대로도 불리지만, 일단 공식적으론 ‘만경대’다. 만물상(萬物相)이 펼쳐지는 곳. 거암(巨巖)과 절리(節理)와 이파리의 천태만상. 계절을 마지막으로 선고하듯, 이곳을 찾은 지난 7일과 17일 모두 안개가 축축했다. 오후부터 날이 개고, 다시 새가 울고, 햇살이 쏟아졌다. 새처럼 사람들이 빨간 입을 벌렸다.
※10월 기준 편도
실로암 막국수와 보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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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 코스 오색약수터~용소폭포~만경대 4.5㎞. 약 3시간 소요. 등산객이 많으면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망경대 입산 시간 오전 8시~오후 3시. 11월 15일까지 개방. 등반 난도 ‘쉬움’.
한계령~대청봉 8.3㎞ 입산 시간 오전 3시~정오. 약 6시간 소요. 난도 ‘어려움’.
대청봉~설악폭포~남설악 탐방지원센터 5㎞. 약 5시간 소요. 난도 ‘어려움’.
실로암 막국수 3대째 운영 중인 메밀 막국수집. 돼지보쌈도 유명하다. 가게에 방앗간이 있어 직접 고춧가루와 참기름 등을 만들어 양념으로 쓴다. 오전 10시 30분~오후 8시. 수요일 휴무.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장산리 228. (033)671-5547.
[설악산=글·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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