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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 자료☆★★/★☆ 등산 여행☆

덕항산

덕항산

     


덕항산 - 1071m 글 노규엽 기자·사진 양계탁 기자
드넓게 펼쳐진 동해바다와 뾰족이 솟은 백두대간 사이에서
오늘도 삶을 이어나가는 땅 삼척。 이 땅에 생동하는 것들은
무엇으로든 한번씩 시련을 겪어야했다。
그러한 시기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덕항산은 운무에 몸을
숨긴 채 쉽사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선을 숨긴 산다운 것을。
비 내리는 덕항산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 여 는 글 삼척의 파도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삼척의 파도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항구도시 삼척에는 늘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강하게 불기도 하고 약하게 불기도 하였지만 어떤 바람이든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존재는 사람보다도 바다였다. 바람이 약할 때면 바다는 잔잔하게 수면을 일렁이며 모래사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거센 파도로 풍랑을 일으키며 성을 내기도 하였다. 바다와 인접해 있어 바다를 삶의 동반자처럼 받아들일 정도로 소금바람에 익숙해져있던 삼척 사람들은 파도가 성을 낼 때에야 비로소 바다의 무서움을 깨닫고는 했다. 더구나 가끔 동쪽의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지진이 발생하면 2시간 여만에 큰 쓰나미(지진 해일)가 들이닥치는 재앙을 경험하기도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듯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라 믿었던 바다로부터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은 허탈한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했으리라.

바다에 피해를 입어 허탈함을 느꼈던 최초의 기록은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의 수로부인 얘기가 아닐까 싶다. 미모가 빼어나 깊은 산과 큰 못 등을 지날 때면 신물(神物)에게 붙잡혀 가곤 했다는 수로부인. 그러한 전력을 지닌 절세의 미인을 삼척의 넓은 바다가 못 본 척 지나갈 리는 없었다. 신라 제33대 성덕왕 때 순정공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임해정이란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해룡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 간 것이다.

 순정공이 땅을 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가르쳐주어 그 말대로 하였더니 해룡이 부인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불렀다는 노래가 그 유명한 <해가사>이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 남의 부녀 빼앗아 간 죄 얼마나 큰가 / 네 만일 거역하여 내놓지 않는다면 /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이 일이 벌어졌던 임해정이란 곳이 어느 곳인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삼척시 교동 증산마을 해안에 ‘해가사터 비’와 ‘임해정’이란 정자를 복원해놓아 설화를 기리고 있다. 어쨌든 이 설화에 따르면 수로부인은 이 근처의 성난 파도 또는 해일에 휩쓸려 갔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이처럼 동해와 인접한 삼척은 과거부터 바다에 의해 울고 웃는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해일에 관해 따져 살펴보면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증보문헌비고>에 1088년 해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1392~1903년에 44회의 해일이 발생했다고 나와 있다. 이러한 기록들의 대부분은 서해안에서 폭풍과 관련해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최근인 1983년과 1993년 일본의 지진으로 인해 동해 지역에 덮친 쓰나미를 우리는 기억한다. 육지까지 바닷물이 넘어오고 가옥을 침수시켰던,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기억. 그만큼 이 지역은 바다로 인한 수해에 안전하지만은 않은 곳이다.

▲ 촛대바위 너머로 바라본 삼척 바다. 성난 파도들이 육지를 덮치는 시련도 삼척사람들은 이겨내었다.
그렇기에 삼척을 이야기하면서 조선 중기 삼척부사를 역임했던 허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도 삼척에는 해파가 심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을 지어 정라진 앞 만리도에 동해척주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고 전한다. 이 신비로운 일을 선뜻 믿기는 힘드나 이 비는 긴 시간동안 파도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삼척 사람들에게는 신성스러운 존재로 받들여지고 있다. 이 비에 동네 아이들이 오줌이라도 누어 훼손시키면 어김없이 수해를 겪곤 했다는 삼척. 그래서 키가 90cm(3척) 정도의 삼척 아이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알고 비를 훼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정라진 근처에는 허목이 세웠다는 동해척주비와 대한평수토찬비가 남아있으나, 역사적으로는 비가 한번 파손되어 조수가 다시 일기 시작해 숙종 36년(1710)에 동해척주비를 모사하여 육향산에 세워 조수를 막았다고 한다. 현재의 위치는 새로 비가 세워진 위치가 음지라 훼손을 염려한 사람들이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장소로 이전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런 신통력을 지녔던 허목도 “지금 같이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 수 있으나,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비석으로는 막을 수 없으니 그때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니 아직 삼척 사람들의 불안이 해결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렇듯 신비한 힘을 빌어 풍랑의 피해를 막았다고는 하지만 이곳 사람들 중에 바닷바람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싫어한 사람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가 밭을 일구며 화전민의 삶을 택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바로 백두대간 주능선의 하나인 삼척 덕항산 자락에서 화전민의 삶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산정에 산제당이 있어 지성으로 빌면 큰 덕을 본다는 전설이 있었다는 산, 또는 이 산을 넘어오면 화전을 일구기 좋은 편편한 땅을 마주칠 수 있는 덕을 봤다는 산이라 하여 덕메기산이라 불리었다는 산이 덕항산이다. 그래서 덕항산 자락인 도계읍 신리와 신기면 대이리에서는 화전민들의 주거지였던 너와집과 굴피집을 찾아볼 수 있다. 너와란 소나무 널빤지를 기와처럼 잘라 지붕을 얹은 것을 말한다. 이런 너와집의 특징은 네모난 공간에 방, 부엌, 외양간이 모두 모인 폐쇄구조를 지니고 있어 산짐승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고, 겨울에도 보온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굴피집은 너와집에서 파생된 것으로 관청에서 소나무 벌채를 금하자 너와 대신 떡갈나무에서 얻은 굴피로 지붕을 이은 것이다. 너와집이나 굴피집 모두 산간지역에 지어진 영향을 받아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든 점이 독특하다. 이는 주거공간과 마구, 화장실을 비스듬하게 하여 마구의 오물이 화장실을 거쳐 거름더미로 빠져나가게 만든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화전민들의 흔적이 신리 너와마을에는 잘 남아 있지만, 대이리에는 띄엄띄엄 따로 남아 있어서 마을의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지역으로 올라가는 덕항산 내 환선굴의 존재로 인해 관광지의 분위기가 나는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동양 최고(最古)라 알려진 환선굴이 있어서야 어쩔 수 없는 일인가도 싶다. 이처럼 삼척은 무언가를 잃어 본 사람들이 억척같이 살아남은 역사의 현장이다. 모든 걸 잃어보고도 여전히 바다와 함께 생을 이어가는 바닷가 사람들도, 허탈함을 견디지 못해 산자락으로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도 모두 삼척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증인들이다. 그에 더해 이 사람들이 살아온 중간 지점에 한반도 역사의 한자락을 대변한 명당자리가 있으니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가 잠들어있는 준경묘이다. 유명한 백우금관 전설이 전해져오는 자리인데, 전설에 따르면 이안사가 삼척에 살던 때 아버지 이양무가 세상을 뜨자 묏자리를 구하기 위해 산 속을 헤매었다. 그러던 중 한 도승을 만나 “5대손 안에 왕이 탄생할 명당인데 반드시 소 일백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금으로 만든 관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그런 물품을 구할 수 없었던 이안사는 백마리의 소(百牛) 대신 하얀 소(白牛)를 구하고, 금 대신 귀리짚으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이렇게 명당에 만들어진 준경묘의 힘을 입어 5대손인 이성계가 고려를 역사의 뒤안길로 물리고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나라의 흥망을 결정한 명당자리가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위치해 있다. 명당일 뿐만 아니라 이곳의 소나무숲은 2005년 제6회 아름다운숲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천년의 숲’으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과 산세를 자랑한다. 활기리 마을에서부터 차량을 통제해 약 1.8km 구간을 걸어 올라서야 감상할 수 있는 이 명당자리에는 반듯하게 자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그 중 유난히도 올곧은 자태를 자랑하는 한 나무는 충북 보은 속리산의 유명한 정이품송과 혼례를 맺은 신부 소나무로 세계최초의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가지고 한국 기네스북에 올라있기도 하다.


▲ 도라지 꽃이 만발한 여름. 삼척의 하늘은 끝없이 넓고 푸르다.
동해의 넓은 바다와 강원 골짜기의 깊은 산세만도 부족해 영롱히 기운을 내세우는 명당자리마저 지닌 삼척이지만, 그래도 삼척은 물과는 떨어질 수 없는 동네인가 보다. 그것은 삼척과 태백의 경계지에서부터 동해로 흘러가는 오십천의 존재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강을 건너려면 50굽이를 감돌고 50개에 가까운 내를 건너야 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름 붙여진 오십천에는 ‘삼수령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옥황상제의 명으로 빗물 한 가족이 땅으로 내려왔다. 땅에서 함께 더불어 살겠노라고 다짐했건만 하필이면 내려온 곳이 태백의 준령 삼수령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아빠는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로, 엄마는 한강 줄기를 타고 서해로, 아들은 오십천에 몸을 실어 동해로 흐르며 각기 헤어지고 말았다.

한반도의 동·서·남쪽을 흐르는 3대강의 원류가 한 지점에 모여 있는 신기함이 이런 구슬픈 전설을 만들어냈을 것이지만, 그것은 오십천이라는 강이 이 지역 사람들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오십천이 삼척 시내를 거쳐 동해에 이른다. 그렇기에 관동팔경 중 제일루라 불리는 죽서루에서도 오십천을 훤히 내다볼 수 있다. 멀리 보이는 태백준령과 가까이로는 대나무숲에 울리는 바람, 거기에 더해 오십천의 맑은 물이 흐르니 죽서루가 가히 신선의 자리라는 찬사를 받아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죽서루라는 누각은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는 했다. 죽서루는 조선 중기 화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고려시대 이후의 수많은 시인들의 작품에 녹아들기도 했고, 율곡 이이와 이승휴 등의 재인들이 오가며 작품들을 남겨놓기도 했다. 아름다움이 예인(藝人)을 낳고 예인은 그 아름다움을 더해준 모습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서있는 죽서루에 딱 걸맞아 보이지 않는가? 삼척에는 오랜 옛날부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쳤다. 자연이 땅을 울린 것만이 아니라 가까운 과거에는 시멘트 사업이 활성화 되어 공장들이 들어서서, 아직까지 삼척의 도로에는 트럭들이 지축을 울리며 지나다닌다. 바다의 폭력에 힘겨웠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시련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잃고 또 새로운 삶을 찾아내 온 삼척, 그리고 삼척 사람들. 현재는 시멘트 산업으로 먹고 사는 바닷가 도시를 넘어 관광 도시로의 발돋움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 허목이 했던 말처럼 “이 땅을 떠나야”하는 상황이 언제 올지 모른다. 삼척동자도 알던 사실이지만 과연 이제는 그 누구가 이를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지금의 삼척은 단지 묵묵히 새로 찾은 삶인 관광 산업에 매진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들의 꿋꿋한 삶이 자연의 시련을 이겨내고 죽서루의 조화로움처럼 부드럽게 융화되어 삶의 방향을 찾아갈 수 있을는지…. 이제 삼척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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